안용복사건과 돗토리 번*
박병섭**
차 례
1. 서론
2. 안용복의 제1차 도일사건
3.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
4. 안용복의 제2차 도일사건
5. 결론
[국문초록]
본 논문에서는 일본의 겐로쿠 시기에 있었던 안용복의 도일 사건과 그에 대한 평가를 한일 양국의 사료를 함께 고려하여 밝히고자 하였다. 안용복 사건은 한일 양국에 걸친 사건이므로 기존 한일 양국에서 상반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안용복 연구의 문제점을 밝히고 이로 파생한
다케시마 일건(Takeshima-ikken)을 검증하고자 하였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 이후 울릉도 도항은 적어도 3회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제1차 도일 이후 총칼의 위협으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연행되어 간 경험이 계기가 되어 1694-5경에
울릉도에서 상당히 경계를 하여 습격에 대비하고 무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693년의 1차 도일 때의 진술에서는 독도=자산도에 대한 인식이 불명확하여 단지 큰 섬으로 말하고 있으나, 1696년 제2차 도일시에는 울릉도-독도 두섬의
위치 및 거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는 1차 도일 이후 거듭 울릉도-독도로 도해를 한 경험에 의해 확실한 인식이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안용복 등이 울릉도에서 만난 일본인을 내쫓았다는 안용복의 진술은 1696년이
아니라 1695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 기록과 관련되는 조선 역사서의 실뢰성 여부를 고찰해보면, 亀춘관지亁나
亀동국문헌비고亁등은 안용복의 호언장담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관찬서인 亀숙종실록亁이나 亀비변사등록亁, 亀승정원일기亁, 亀변례집요亁등은 그 때마다 안용복 공술의 신빙성을 판단하여 기술하였으므로 안용복의 장담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러한 판단은 쓰시마번과의 어려운 교섭을 하는데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亀숙종실록亁과
동시대의 관찬서는 안용복 사건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므로 신뢰성이 높다.
주제어;
안용복 사건, 다케시마 일건, 겐로쿠시기, 돗토리번
1. 서론
일본의 겐로쿠(尦釸, 1688–1704) 시기에 조선의 어민
안용복은 두번이나 일본에 왔는데, 그의 언동은 오늘의 독도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정반대라 할 만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독도문제의 대표적인 연구자로 알려진 신용하(溎淂)는亀조선실록亁에 실린 안용복의 공술을 거의 사실처럼 받아 들이면서, 그를 독도의 수호자로서 높이 평가했다.[1]
이에 대해 일본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의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모죠 마사오(壓瀶惓抝)는 안용복을 乪모든 악의 근원乫이라 하면서, 그의 자기정당화를 시도한 공술이
실록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그에 대한 영웅상이 형성되었다고 평하였다.[2]
또 나이토
세이츄(內摗惓拞)는 乬한국과 북한에서 행해지고 있는
안용복 연구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취조한 비변사에서의 공술 내용을 기록한 亀조선실록亁에만 의존하고 있고, 상대측인 돗토리 번(捁庢斔)의 사료(巎椏)에 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3]乭고 한국을 비판하는 한편, 일본의 乪일국주의사관(堦殸庡媊揑巎鎂)乫도 똑 같이 비판했다. 사실 한국의 연구는 일본의 역사자료를 충부히
조사하지 않은 경향이 있음과 동시에 일본의 연구도 조선 역사서를 골고루 조사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안용복사건은 조일 양국에 걸친 사건이기 때문에
양국의 역사서를 충분히 대조하여 비로소 그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그런 종래의 문제점을 고려하여 안용복사건이나 그로 인해 파생한 乪다케시마 일건 (抾搰堦審)乫 즉 울릉도쟁계(烼椝搰啷奅)를 검증하기로 한다.
2. 안용복의 제1차 도일사건
(1)
안용복의 피랍
1693(尦釸6)년 봄에 울릉도로 출어한 조선 어민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 어선에 의하여 돗토리 번으로 연행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이른 바 안용복의 제1차 도일사건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싼 외교교섭 乪다케시마일건乫, 조선에서 말하는 乪울릉도쟁계乫가 시작됐다. 이 교섭이 다케시마일건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 에도 (峕戶)시대 울릉도가 다케시마 (抾搰)라고 불린 까닭이다. 덧붙여서 말하면 오늘의 독도는 마쓰시마(徏搰)라고 불렸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다만 다케시마라고 쓸 때는 인용문을 제외하고 울릉도를 가리키고, 마쓰시마는 오늘의 독도를 말한다.
안용복을 돗토리 번으로 연행한 자는 요나고 (暷巕) 상인 오야 (戝扟, 戝壆)가의 사공이었다. 일찍이 오야 가와 무라카와(懞愳) 가는 다케시마 도해의 허가를 에도 막부(峕戶枊晎)에게 신청했었다. 도해 허가는 막부로부터 돗토리번
태수에게 1625년 경 내려졌다. 이 허가는 양 가문이 乪이번에乫 다케시마로 도해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결코 영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양 가문은 매년 울릉도로 출어를 하고 있었다.
오야, 무라카와 양 가문은 다케시마에서
전복을 따고나 느티나무를 베고 마쓰시마에서 강치 사냥을 하여 이익을 얻었는데, 그런 도해가 약 70년간 평온하게 이어졌다. 울릉도는 조선정부가 왜구의 피해를
막기 위해 쇄환 정책을 펴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양국의 사람들이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도해는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어민들도 자연의
혜택이 풍부한 울릉도에 주목하여 이 섬에서 은밀히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1692 (숙종 18)년 조선의 어민들이 어렵을 하고
있는 것을 무라카와 가 도해선이 발견하였다. 이로 인해 무라카와 가는 거의 수확을 하지 못한 채 귀국하여, 이 전말을 돗토리번에게 호소했다. 돗토리번 亀히카에쵸 (峊挔)亁에 의하면 돗토리번이 乬월번 로주(寧斣老拞)[4]
아베 분고노카미(垻晹朙屻庣)에게 여쭈었더니, 조선인이
그 섬에서 돌아갔으면 아무 문제도 없다.乭 [5]라는 것이었다.
다음 해 오야 가가 다케시마로 갔더니 역시 조선 사람이 와 있었다. 그 때문에 양 가문은 2년 계속해서 수확이 없었다. 그래서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오야 가 사공은 인질로 조선 사람 두명을 붙잡아 돗토리번으로 납치를 했던 것이다. 이 납치사건을 조선의 관찬서인 亀숙종실록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6]
계유년 봄에 울산(塙嶳)의 고기잡이 40여 명이 울릉도에
배를 대었는데, 왜인(榒恖)의 배가 마침 이르러, 박어둔(杙墬撛)·안용복(埨棿暉) 2인을 꾀어내 잡아서 가 버렸다. 그 해 겨울에 대마도(洈攏搰)에서 정관(惓姱) 귤진중(媖崃廳[7])으로 하여금 박어둔 등을 거느려 보내게 하고는, 이내 우리나라 사람이 죽도(抾搰)에 고기 잡는 것을 금하기를 청했는데, 그 서신(彂怣)에 이르기를,
乬귀역(婱堟)의 바닷가에 고기 잡는 백성들이 해마다 본국(杮殸)의 죽도에 배를 타고 왔으므로, 토관(搚姱)이 국금(殸嬛)을 상세히 알려 주고서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것을 굳이 알렸는데도, 올봄에 어민(嫏柉) 40여 명이 죽도에 들어와서 난잡하게 고기를 잡으므로, 토관이 그 2인을 잡아두고서 한때의 증질(鏆幙)로 삼으려고 했는데, 본국(杮殸)에서 번주목(敠廈杚)이 동도(搶搒)에 빨리 사실을 알림으로 인해, 어민을 폐읍(暰梂)에 맡겨서 고향에 돌려보내도록 했으니, 지금부터는 저 섬에 결단코 배를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금제(嬛惂)를 보존해 두 나라의 교의(岎媌)로 하여금 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乭
했다.
亀숙종실록亁에서는 안용복·박어둔 두 사람이 처음부터 울릉도를 향해 도항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박어둔은 귀국한 후 동래부(搶萊晎)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乬울진(塙捒)에서 삼척(嶰锠)을 향하다가 표류(昚棳)를 하여 이른 바 죽도(抾搰)라고 하는 곳에 이르렀다. [8]乭라고 진술하였다. 이와
같은 진술은 박어둔 등이 조정의 해금정책을 지키지 않고 출어했기 때문에, 그 죄를
모면하기 위해 표류했다고 말한 것 같다. 그 당시 조선의 각지에서 울릉도로 슬며시 나가는 배가 있던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상황을 좌의정 목래선(杛樢慞)이 이렇게 말했다.[9]
경상도 연해의 어민들은 비록 풍파 때문에 무릉도(晲椝搰)에 표류했다고 칭하고 있으나, 일찍이
연해의 수령을 지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바닷가 어민들이 자주 무릉도와 다른 섬에 왕래하면서 대나무도 베어오고 전복도 따오고
있다 했습니다. 비록 표류가 아니라 하더라도 더러 이익을 취하려 왕래하면서 어채(嫏嵦)로 생업을 삼는 백성을 일체 금단하기는 어렵다고 하겠으나 저들이 기왕 엄히 조항을
작성해 금단하라고 하니 우리 도리로는 금령을 발해 신칙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동해 연해의 수령은 어민들이 생업을 위해 무릉도에 자주 출어하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용복 등이 처음부터 전복을 따오는 것 등을 목적으로 무릉도에 왕래한 것은 안용복의 일본에서의 공술에서 뒷받침된다. 훗날 안용복과 박어둔 두 사람은 돗토리 번에서 나가사키(挿嶈)로 보내져 취조를 받았는데, 안용복은 쓰시마번의 취조에서 출항의 목적을 乬우리가 그 섬(울릉도)에 건너간 것은 전복이나 미역이 굉장히 많다고
듣고 벌이를 위해 건넜습니다. 유선(椶慏)도 그렀습니다乭라고 공술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출어한 자는 안용복 일행만이 아니었다. 그는 유선인 乬전라도
슌덴이란 곳의 배乭와 乬경상도 가토쿠란 곳의 배乭도 울릉도에 4월 5일에 왔다고 말했다.[10] 그 해에 조선인이 울릉도에 들어갔다는 것은 요나고(暷巕)의 상인인 오야 가문 사공의 상세한 증언에서도 뒷받침된다.[11]
안용복은 쓰시마번의 심문에서 도해의 일정을 상세히 말했다. 그것에
따르면 안용복 등은 1693년 3월 15일에 울산을 출항하고, 같은 날에 乪부이카이乫에 도착해, 그 곳을 25일에
출발, 같은 날 영해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27일에 바같 바다에 나가고, 같은 날에 무릉도(다케시마)에 도착했다고 구술했다. 그 섬에서 전복 등을 따던 중에 일본에서 출어하러 온 오야 가문의 사공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 경위를 안용복은 이렇게 말했다. [12]
우리들이 그 섬(울릉도)에 있었을 때 조그마한 집을 만들고
그 집에 바쿠토라히라는 자를 남겼는데 4월 17일에 7,8명이 탄 일본 배 한척이 나타나 그 집에 와서 바쿠토라히를 잡아 작은 배에 태우고
집에 둔 조그마한 보따리를 가지고 나갔습니다. 안요구가 거기에 가서 안된다라고 말하고 바쿠토라히를 육지에 데려오기 위해 작은 배에 탔습니다. 바로 배가 뗬습니다. 두 명 모두 본선에 실리자 재빨리
출선했습니다. 오키국에 같은 달 22일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바다 위에 있었습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안요구(안용복)는 일본인에게 잡힌 바쿠토라히(박어둔)를 육지로 데려오려고 일본인의 배에 탔으나 배는 그냥 떠나 버렸기 때문에 둘 다
본선에 옮겨져 일본에 연행되었다는 것이다. 그 날을 안용복은 4월 17일이라 공술했지만 그들을 연행한 오야 가문의 사공 구로베에(麷暫塹)와 히라베에(暯暫塹)는 4월 18일의 일이라고 하여 요나고로 귀착한 후
아래와 같은 乪오야 규우에몬 사공 구상 각서(戝壆嬨塃塹栧慏摢岥忋鍿)乫를 돗토리번에 제출했다.[13]
(4월) 18일에는 소선(彫慏)에 수부(悈晇) 다섯 명과 우리 두 명, 이상 일곱 명이 타고, 서쪽 포구에 가보았지만, 외국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북쪽 포구로 가보았더니, 외국
배 1척이 정박해 있고, 임시로 작은 집을 만들고 있었고, 거기에는 외국인 한 명이 있었습니다.
집 안을 보았더니, 전복과 미역을 많이 거두어 놓았기에,
그 외국인에게 사정을 물어보았으나, 통역이 없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 외국인을 배에 태우고, 오오텐구라는 곳을 찾아갔더니, 외국인 열 명 정도가 어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말이 통하는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이쪽 배에 태우고, 전에 북쪽 포구에서 태웠던 외국인을 배에서 내리고, 그 외의 한 사람, 모두 두 외국인을 태우고 그 사정을 물었더니, 통역이 말하기를 3월 3일 이 섬에 고기잡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배는 몇 척인가 물었더니, 세 척에 42명이
타고 왔다고 했습니다.
다케시마는 거친 해변이기 때문에, 이쪽의 작은 배는 불안정합니다. 두 명의
외국인을 태우고 원래의 배(큰 배)로 돌아왔습니다. 앞의 외국인을 데리고 돌아 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작년에도 이 섬에 외국인이 있어, 다시 이 섬으로 건너와 어렵을 하는 일은 절대 안 된다고 야단치고 협박하면서 여러 번 말했는데도, 또 금년에도 외국인이 어렵을 하고 있어서,
이후에는 섬에서 어렵을 할 수 없읍니다. 성가신 줄은 압니다만, 말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 외국인
두 사람을 데리고, 4월 18일에 타케시마를 떠나, 오키국(瑾婒殸)의 후쿠우라(暉塝)에 20일에 도착했습니다丒丒丒丒
안용복의 증언은 연행된 시점에서 4개월 이상이나 지나서 행해진 것에
비해 사공의 증언은 불과 10일 후의 일이었으므로, 날짜에 관해서는 사공의 증언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 연행사건에 대해서 박어둔도 동래부에서 비슷한
공술을 했다.亀변례집요亁에 의하면 그는 乬왜인 7, 8명이 갑자기 와서 배에 태워 우리를 잡혀갔다.乭 [14]고 말했다. 그런데 7개월 후 경상감영(娔歾)은 박어둔 등 두 사람은 총칼로
위협받고 잡협다는 하는, 아래와 같으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15]
(박어둔 등은) 표류해 무릉도로 이르렀다. 김덕생(嬥惗)등 여섯 명은 상륙해 몸을 숨기고 있었다. 박어둔 등 두 사람이 아직 하선하기
전에 왜인 여덟명이 배에 와서, 도검(搧櫂)이나 총으로 위협해 잡아 떠났다.
그 당시 일본의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의 배는 강치 사냥을 위해 항상 돗토리번에서 총 일곱 자루정도를 빌리고 있었다.[16]
그 총아나
칼로 위협받아 안용복 등이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안용복이 가까이에서 본 독도
안용복은 오야 가문의 배로 연행당해 오키도로 갔을 때 그는 오늘날의 독도를 가까이에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694년 1월에 동래부에서 취조를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17].
안용복의 공초 안에 산형과 초목 등에 관한 말은 박어둔의 말과 한결 같은데, 끝에 乬제가 잡혀 (백기주로) 들어올 때 하룻밤을 지나고 다음날 저녁을 먹고 난 뒤 섬 하나가 바다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는데, 죽도(抾搰)에 비해 자못 컸다乭고 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안용복 등이 납치된 섬 이름이 抾搰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일본이 주장하는 섬 이름을 안용복이 그대로 말했을 뿐이며 안용복은 그 섬 (울릉도)을 무릉도라 부르고 있었다. 그 섬에서
배로 하루 정도 걸리는 떨어진 곳에 안용복이 큰 섬을 보았다는 진술은 매우 중요하다. 박어둔은
이 때에 배 멀미를 앓고 누워 있었기 때문에 섬을 보지 못해 乪다른 섬은 없었다乫고 구술했다. 안용복이 보았다고 하는 이 섬이야말로 오늘날의 독도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당시 오야丒무라가와
양 가문의 배는 다케시마에 왕복하는 길에 항로의 안표인 마쓰시마(독도)를 경유하는 것이 통례였으며, 더군다나 울릉도에서 일본 방향으로 배로 하루정도 떨어진 섬은 독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그 때 오야 가문의 배가 마쓰시마에 들렸던 것은 亀인푸 역년 대잡집 (場晎歷擭戝瓒廤)亁에 乬새벽 마쓰시마라는 곳에 도착했다乭라고 기록되어
있다.[18] 이 자료에서는 마쓰시마에 들렸던 것이 새벽으로 되어 있어 안용복이 말한 乬저녁 식사
후乭와 시간이 맞지 않자만, 그것은
기억이 틀렸거나 필기를 잘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안용복의 공술에서 乬다케시마에 비해 굉장히 크다乭라는 표현은
반드시 독도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이것은 그 나름대로의 과장된 표현이었으리라 생각 된다. 일찍이 시모죠(壓瀶)는 그러한 乪큰 섬乫은 오키도 밖에 없다는 이유로 안용복이 본 섬은 독도가 아니고 오키도라는 설을 오랫동안
주장하고 있었다.[19] 그러나 시모죠는 최근에 그 설을 철회했는지 안용복이 본 섬은 울릉도의 바로 근처에 있는 乪죽도 (죽서)乫라고 주장을 바꾸었다.[20] 시모죠는 그 이유로亀다케시마 기사 (抾搰婭帠)亁 (尦釸6년 11월 1일)에 기록된 안용복의 다음 증언 중에 乪동북乫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던 것이다.
인질이 여기에 머물러 있을 당시
질문 했을 때 대답한 것으로 乬이번에 나간 섬의 이름은 모릅니다. 이번에 나간 섬의 동북에 큰 섬이 있었습니다. 그 섬에 머물던 중에 두 번 보았습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말하기를 우산도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대체로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로 보였습니다乭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울릉도란 섬에 대해서는 아직껏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질의 주장은 허실을 가리기 어려우니 참고로 아룁니다. 그 쪽에서 잘 판단해 들으십시요.
시모죠는 안용복이 어렵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울릉도 저동에서 볼 때 동북에 있는 섬은 죽도(죽서)밖에 없다고 단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나침반이 흔히 사용되지 않았던 그 당시는 해상의 방향이 틀리기 쉬운 것은 당연하다.[21]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밤에는 먼 섬이 보이지 않고, 낮에는 대략의 방향을 알 뿐이다. 더군다나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울릉도 해변에서는 독도를 볼 수 없어서 독도의 방향을
알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모죠는 가장 믿기 어려운 乪방향乫에 의거하고, 보다
신뢰성이 높은 증언인 乪하루의 거리乫를 무시했다. 이처럼 마음대로 자료를 취사 선택한다면 어떠한 결론도 가능하다. 물론
그러한 결론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안용복이 말한 乪큰 섬乫에 대해 다가와 고조(揷愳岶嶰)는 오늘의
독도라고 주장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C) 안용복 등은 울릉도의 동북에서 실제로 두 번 목격한 섬을 우산도라 듣고, 그 거리는 대체 하루의 노정이고 큰 섬이라고 한 것이다. 丒丒丒丒丒(C)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개 이 조건에 맞는 것으로는 다케시마(리얀쿠루)이외에는 찾을 수 없다. 즉 우산도는
이 다케시마에 비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22]
다가와는 안용복이 말하는 乪큰 섬乫은 乬우루친도에서 동북으로 희미하게 보인다[23]乭라고 하는 乪부룬세미乫에 해당하며, 메이지(柧帯)시대에 리얀쿠루라고 불리던 섬, 즉 오늘의 독도라고 결론 지웠던 것이다.
(3)
오키국(瑾婒殸)에서의 안용복
1693년
4월 20일, 일본의 오야 가문의 배에 의해 연행된 안용복 등은 오키도 후쿠우라(暉塝)에 도착했다. 도착한 날을 亀다케시마 기사亁는 안용복의 공술에 따라 4월 22일이라 했지만, 오야
가문의 사공은 20일이라고 했으므로 20일이
옳다고 생각된다. 오키도는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이 다케시마(울릉도)로 도해할 때 바람을 기다리던 섬인데 거기에는 도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恄幮)까지 세워졌다. 그 당시 오키국은 에도 막부의 직할지였다. 오키국의 번소(斣強, 관아)에서 안용복과 그를 연행한 오야 가문의 사공들은 취조를 받았다. 번소는
사공들에게 조선인을 연행한 경위를 써서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사공들은 조선인에게 직접 물으라고
하면서 이 요구를 거부했다. 번소도 이를 납득하고 안용복 등을 직접 심문하였다. 이 때 안용복이 공술한 내용이 乪당인(搨恖, 외국인) 두 사람 중 통역의 진술乫 로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다.[24]
통역 이름은 안헨치우 나이 43
주소는 조선의 돈넨기라는 곳
하인 이름은 도라헤
주소는
같은 울산의 자(幰)
삼계(嶰奅)의 샤쿠완부터 전복을 따오라는 분부를 받았는데, 어느 나라(지방)에서 따오라는 명은 없었던 듯. 작년에 온 자는 다케시마로 갔다고 들었으므로 다케시마에서 미역이나 전복을 딴다고 말함.
이 두 명의 조선인이 가슴에 건 명찰의 문자는 아래와 같음丒丒丒丒
이 문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일본어의 통역으로 일행의 이름이나 주소, 나이, 울릉도로 나간 경위 등을 대답했다. 안용복은
그 섬에 간 목적을 샤쿠완의 명령으로 전복이나 미역을 따기 위한 것이라 말했다. 이 취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안용복 등의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가 필사된 점이다. 그것이 후대에 오카지마 마사요시 (壀搰惓媊)가 편찬한 亀다케시마 고(峫)亁나 亀인푸 역년 대잡집亁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근거하여 안용복은 서울에 사는
오충추의 사노로서 성은 없고 이름은 용복(梡杕)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25] 안용복의 개인정보가 드문 가운데 이것은 귀중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취조
후 번소는 안용복 등에게 술통을 주었다고 한다.[26] 이로 미루어 보건데 취조는 온화하게 끝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23일에 안용복 등을 태운 오야 가문의 배는 오키의 도젠(搰慜)으로 가고, 도젠 출신의 어부들을 내렸던 것 같다. 26일에
그 곳을 출발해 이즈모국(弌塤殸)의 나가하마(挿昹)로 들렸다가, 27일에
요나고에 도착했다. 그 후 안용복 등을 조사한 번소는 보고하기 위해 乪조선인 구술서(挬慛恖岥弎彂)乫를 작성하여
다이칸 관아(戙姱強)에 제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일본에서 말하는 다케시마로 온 세 척의 배중 한 척은 3월 27일에 부산을 출항해, 그 날에 다케시마로 왔다. 그 배의
인원은 사공인 안헨치우를 비롯해 선원이나 대장丒목수
등 열 명이고, 그 중 야가이 등 세 명은 작년에도 온 적이 있다. 배에는 쌀 10섬과 소금 3섬이
있었다. 다른 배에는 17명과 15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의 확실한 이름은 거의 모른다. 15명이
탄 배 중의 한 명은 작년에도 온 적이 있다.
이 구술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무릉도를 조선 땅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4)
돗토리번(捁庢斔)에서의
안용복
4월 27일 안용복 등은 돗토리번 호키국의 요나고에 도착했다. 조선인 연행에 관한 보고는 요나고 (暷巕) 성에 체재하고 있었던 가로(壠榁) 아라오 슈리(峳旜廋棟)를 통해 번청(斔淜)이 있는 돗토리부(捁庢晎)에 4월 28일에 전해졌다. 번청은 번주가 체재하는 에도의 돗토리 번저(斔揁)로 파발꾼을 보내는 한편, 에도
막부로부터 지시가 있을 때까지 외국인을 오야 규에몬 집에 감금시켜 야마토 조(戝榓慻)에게 경비를 명했다.[27] 파발꾼은 5월 9일에 에도 번저에 도착하였다.[28] 다음 날에 번저의 기키야쿠(暦栶)인 요시다 헤이마(媑揷暫攏)가 막부의 최고 실무 책임자인 월번 로주 쓰치야 사가미노카미(搚壆憡柾庣)에게 乽조선인 구상서乿와乽무라카와丒오야 사공의 구상서乿를 가져가 이 사건을 보고하고, 사건의 처리 방법을 물었다. 乽무라카와丒오야 사공의 구상서乿란 앞의乽오야 규우에몬 사공 구상서乿를 가리키는 것 같다. 로주의 지시는 13일에 에도의 돗토리 번저에 전해졌다. 그 내용은
조선인을 외국과의 통상을 다루는 나가사키 부교 (曭峴, 관리자)에게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가사키로 보내는 사자(巊幰)의 총수는 재작년에 이국선을 나가사키로 보냈던 때와 똑같이 하라고 로주는 상세하게 지시했다.[29] 로주의 지시에 따라 번저는 나가사키 부교에 보낼 서한과 나가사키로 가는 사자가 가져갈 구상서를 5월 16일에 작성해, 그것들을
파발꾼으로 하여금 돗토리 번청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 중에서 번주(斔庡) 마쓰다이라 호키노카미(徏暯攲闼庣)가 나가사키
부교에게 보냈던 구상서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돗토리번이 로주에게 제의한 내용에 대해서도 서술해, 금후 조선인이 다케시마로 오지 않도록 하고 지금처럼 다케시마의 전복을 로주에게 헌상(噘忋)하고 싶다는 제의를 로주는 들어 주었다고 적었다.[30]
로주의 뜻을 전하는 에도 번저의 파발꾼은
5월 26일에
돗토리 번청에 전달되어 번청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조선인을 나가사키로 보내는 사자는 만일의 경우를 고려해 야마다
헤이자에몬(嶳揷暫嵍塹栧)과 히라이 진우에몬(暯堜恟塃塹栧) 두 명으로 하고, 동행하는
의사는 치쿠마 겐세키(抾娫尯愖), 이송
담당은 요나고 조(暷巕慻) 중에서 두 명을 충당했다. 또, 나가사키로 가는 길로서, 해로는
위험하므로 육로로 정했다. 조선인의 이송에 돗토리번이 신중을 기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31] 이렇게 신중한 이유는 돗토리번에서는 에도 막부와의 약속은 절대적이고 추후의 어긋남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번주의 마쓰다이라 호키노카미 (이케다
미쓰나가, 抮揷岝拠)는 원래대로라면 비젠(旛慜) 오카야마번(壀嶳斔)을 이어가고 있을 상황이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중요한 오카야마번을 맡길 수 없다는 에도 막부의 판단으로 녹봉을 줄여 돗토리번으로 전봉(鐉晻)을 당한 것이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을 갖는 에도 막부의 명령이니 일단 명을 받은 이상 만전을 다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안용복 등은 나가사키로 보내기로 결정했으므로, 그 준비를 위해 안용복 등은 돗토리 성하(忛壓)에 이송되었다. 이송
때에는 함부로 구경하러 나가지 말라는 명이 내려졌다.
조선인이 난폭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 특히 여자나
어린아이들의 구경은 금지되었다.[32] 그 때까지 안용복 등은 요나고의 오야 저택에서 외출을 금지 당하고 그 대신에 술을 하루에 3승(5.4 리터)까지 허락 받는 감금 상태가 한 달 이상
지속되었으므로,[33] 혹시라도 술기운에 한바탕 소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6월 1일에 안용복 등은 이나바국의 돗토리 성하에 도착해 중신의 아라오 야마토(峳旜戝榓) 저택에서 하루 밤을 지냈다. 다음
날 같은 중신인 와다 시키부(榓揷幃晹), 쓰다
쇼켄(捗揷洅娔),
이케다 휴가(抮揷擔岦)등 세 명이 나란히 아라오 택을 방문해 안용복(안핑샤) 등과 만났다.[34] 그 목적이나 면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나이토 세이츄에 따르면 중신들은 호기심에서
만난 것이 아닌가라는 상정을 하였다[35].
안용복 등은 중신들과 만난 직후 조회소(挰橉強)로 옮겨져, 6월 7일에 나가사키로 출발했다. 나가사키에는 이미 결정된 수행자 이외에 조선인을 위한 요리인이 1명, 가마를 메는 족경(懌鏹)이 조선 사람 한 사람당 4명씩 수행했다.[36] 따라서 일행의 총인원은 16명이 되었다. 일행은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각지에서 접대를 잘 받았던 모양이다.[37]
그 사이에 에도 막부는 다케시마(울릉도)의 조사를 시작했다. 5월 21일에 간죠 부교(姩掕曭峴) 마쓰다이라 미노노카미(徏暯旤擹庣)는 돗토리 번저에 다케시마 도해에 관한 질문을
했다. 번저는 곧 대답할 수 있는 항목에 관해서는 다음 날 회답서를 제출하고, 돗토리에 질문할 필요가 있는 사항에 관해서는 한 달 후인 6월 27일에 회답서를 제출했다. 두 번에 걸친 회답서에서 도해 면허는 아베 시로고로(垻晹巐屲)의 알선으로 로주의 봉서(曭彂)를 받아서 행했던 것이나,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이 도쿠가와(愳) 장군 가문의 문장(栦復)을 배에 세우고 도해했던 것, 그 문장 덕분에 조선에 표류했을 때 쉽게 일본 배임을 알고 쓰시마를 통해 송환되었던
것, 돗토리번이 막부에게 헌상한 전복은 다케시마의 전복이었다는 사실 등이 적혀 있었다.[38]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다케시마는 돗토리번의 지배지가 아니라고 명언해 乬다케시마는
이도(棧搰)로서 사람이 거주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 호키노카미가 지배하는 땅도 아니다.乭라고 회답한 점이다.[39] 돗토리번은 다케시마 도해가 막부의 허가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케시마는 막부의 관할 하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돗토리번으로서는 그러한 장소에 조선인이 왕래하여 전복 등을 따고 일본인 어부의 방해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직접적인
관리자인 막부에게 조선인의 왕래 금지를 요청한 것이다.
(5) 조선 역사서가 본 안용복 연행사건
조선 역사서가 안용복 연행사건을 어떻게 기술했는지를 간단히 보기로 한다. 먼저
안용복 연행사건으로부터 77년 후에 간행된 亀동국문헌비고亁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책은 안용복의 공으로서 乬백기주(攲闼廈, 호키주)의 태수는 마침내 관백(钀敀, 간파쿠)에게 상담해, 안용복
등에게 서계(彂宊)를 만들어 주면서 말하기를, 乪울릉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乫라고 했다乭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안용복이 귀국한 후에 비변사에서 공술 한 내용을 그대로 믿고 기술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잘못된 어구를 지적하고자 한다. 乪백기주(호키주)乫란 호칭은 적당하지 않다. 보통 乪호키乫 또는 乪호키국乫, 乪백주(攲廈)乫라고 불린다. 혹은 번 이름이면 乪돗토리번乫이라 한다. 다만 번 이름이 일반화 된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이고, 에도 시대에 번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乪돗토리번乫이나 乪쓰시마번乫이라고 했다. 돗토리번은 호키국과 번청이 있던 이나바국을 지배했다. 하편 에도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정식으로는 乪정이대장군(惇埼戝洅孯)乫 약칭하여 乪장군乫이라 불렸다. 따라서 안용복이 말하는 乪관백乫은 乪장군乫이라 해야 할 것이다. 관백은 덴노(揤峜)를 모시는 최고 관직명이며, 에도시대는 장군과 다른 인물이 임명됐다.
한편 亀동국문헌비고亁는 안용복 사건부터
77년이나 경과된 후에 쓰였기 때문에 자료로서 한계가 있다. 이에 비해 亀숙종실록亁은 같은 시대의 기록으로서 보다 중요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亀숙종실록亁은 亀동국문헌비고亁와 달리, 안용복 등의 공술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특히 乪서계乫에 관한 안용복의 공술로서 乬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의 땅이라 하고, 관백의 서계까지 받았다乭라고 소개했으나,[40] 亀숙종실록亁 나아가서 조정은 그 말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용복의 공술에 회의적이었다. 특히 1694년에 접위관으로 부임하여 동래부에서 안용복 등을 직접 심문한 적이 있는 유집일(檂廤堦)은 안용복이 말한 乬호키주(攲闼廈)에서 준 은화(嬧壿)와 문서(暥彂)를 대마도(洈攏搰) 사람이 겁탈했다乭는 이야기를 전혀 신용하지 않았다. 유집일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41]
근년 동래에 봉사(曭巊)했을 때에 안용복을 추문(悇栤)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乬호키주에서 준 은화(嬧壿)와 문서를 쓰시마 사람이 겁탈했다.乭 했는데, 이번 그가 호키주에 정문(掓暥)한 데에는, 乬쓰시마 도 사람이 2천 금(嬥)으로 나를 속(孳)바치고 본국(杮殸)에 내보낸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은은 본국에서 받겠다고 했다.乭고 했으니, 전후에 한 말이 매우 어그러집니다. 또 쓰시마는 본디 속은(孳嬧)을 와서 거둔 일이 없고, 임술 약조(恜滫栺瀶)도 비밀에 관계되는데, 안용복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왜인은 모두 죽도(抾搰)가 호키주의 식읍(怘梂)이라 하므로, 안용복이 한 번 말했다 해서 조선
땅이라 쾌히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용복의 정문 가운데는 울릉도는 본국 땅이라고 여러 번 말했으나, 왜인이 문답한 문서와 안용복을
내보낸다는 문서에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들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다시 핵사(鍵嵏)해 실정을 알아 낸 뒤에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유집일은 일본이 乪호키주의 식읍乫으로 하고 있는 다케시마에 관해
외교 사절도 아닌 납치를 당한 한 어부가 아무리 영토 주장을 한다고 해서 일본이 쉽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안용복에게 다케시마를 조선 영토라고
인정하는 서계를 써 주었을 리가 없다고 꿰뚫어 보고 있었다. 유집일의 동찰력은 맞다. 안용복의 공술을 신용하지 않은 최고 권력자인
영부사(椞晎帠) 남구만도 마찬가지였다. 남구만은 이렇게 말했다.[42]
안용복이 계유년에 울릉도에 갔다가 왜인에게 잡혀 호키주에 들어갔더니, 본주(杮廈)에서 울릉도는 영구히 조선에 속한다는 공문(岞暥)을 만들어 주고 증물(憽暔)도 많았는데, 쓰시마도를 거쳐서 나오는 길에 공문과 증물을 죄다 쓰시마 사람에게 빼앗겼다 하나, 그 말을 반드시 믿을 만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남구만은 안용복이 3년후 자청해 도일하자, 그 정열을 평가해 안용복의 말을 믿게 되었지만, 조정에서는 안용복이 말하는 乬호키주에서 준 은화(嬧壿)와 문서乭 이야기를 거의 아무도 신용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렇게 亀숙종실록亁에서는 안용복의 공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6) 안용복은 에도(峕戶)로
갔는가?
안용복 연행사건을 계기로 조정과 쓰시마번 사이에 일본이 말하는 乪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 교섭에 안용복의 언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안용복의 일본에서의 행보가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용복 등은에도에 가서 후하게 접대를 받았는지의
여부가 교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정은 안용복 등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공술에서 안용복 등은 에도로 가서 노자(路帒)를 받는 등 후한 접대를 받았다고 이해했다. 그 반면에 쓰시마번이 안용복 등을 냉대한 것은 에도 대군(戝孨)의 의사와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대우의 차이에 관한 이해에 그치지 않고, 쓰시마번의 교섭 태도를 그렇게 이해했다.
즉 쓰시마번이 조선의 서한에서 乪폐경지울릉도(暰嫬擵塗椝搰)乫라는 구절을 삭제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한
것은 쓰시마번이 에도 막부의 뜻과는 달리 독선적으로 乪다케시마 일건乫의 교섭을
하고 있다는 불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43] 그러한 배경을 해명하기 위해서도, 안용복 등은 과연 에도로 갔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조선정부의 견해에 부합이라도 하듯이 일본의 일부 자료에서는 안용복 등이 돗토리번에서
에도 막부로 보내졌다는 기술이 있다. 그 대표적인 자료중의 하나가 오야 가문의亀다케시마 도해 유래기 발서(漊彂)亁이다. 그 기록은 겐로쿠 7년(6년의 잘못) 오야
가문이 안용복과 박어둔을 연행한 사건의 후일담을 이렇게 적고 있다.[44]
돗토리부(捁庢晎)에서 조사한 후에 당인(搨恖)을 에도부(峕戶晎)로 인도했다. 에도부에서
심문이 끝나면, 순차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따로
기록이 있으므로 이것을 생략한다.
이처럼 亀다케시마 도해 유래기 발서亁는 안용복 등이 에도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신뢰성은
의문이다. 이 책은 乪다케시마 일건乫 후, 150년 이상 경과 한 1868년에
오야 가문의 자손에 의해서 쓰였기 때문에 틀린 기술도 많다. 예를 들면 위의 구절에서 연호를 겐로쿠 6년이라 해야 되는데 7년으로 잘못 쓰고 있는 점이나, 또 다케시마
도해 면허를 받은 해를 겐나(尦榓) 4년, 1618년으로 하고 있으나, 이케우치의 연구에 의하면 1625년이 맞다.[45] 이처럼 이 책은 전반적으로 틀린 부분이 많고 신뢰성이 낮은 사료이므로,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른 사료와의 대조가 필요하다. 다른
사료 亀이본 호키지(堎杮攲闼巙)亁에도
乬이인(堎恖)을 에도로 보냈다乭고 기록되어 있지만,[46] 그 사료는 제목에도 있듯이 乪이본乫이므로 참고 정도의 가치만을 지닌다. 본래의 亀호키지亁에 그러한 기술은 없다.
이와는 달리 공적인 사료, 예를 들면 돗토리번의 亀히카에쵸亁나 亀고요닌 닛키 (屼梡恖擔婰)亁등에는 안용복 등의 에도 행을 시사하는 기술이 전혀 없다. 더구나 지금까지 상세히 살폈던 것처럼 돗토리번이 안용복 등을 나가사키로 보낸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어서, 에도로 갔다는 설이 성립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한편 조선의 역사서인 亀숙종실록亁에 안용복 등의 에도 행을 인정하는 기사가 있다. 그것은 에도로 끌고 간 어민을 에도의 대군(장군)이 후하게 접대한 것을 감사하는 쓰시마번
앞으로 보낸 서간으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47]
우리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울릉도)에 갔는데, 의외에도 귀국(婱殸)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 와 서로 맞부딪치게 되자, 도리어 우리나라 사람들을 끌고 에도까지
잡아갔습니다. 다행하게도 귀국 대군이 충분하게 사정을 살펴보고 많은 노자(路帒)를 주어 보냈으니, 이는
교린(岎椬)하는 인정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바입니다.
한국에서는 이 기사를 근거로 삼아 안용복 등의 에도 행을 믿는 연구자가 많은 듯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서한을 받은 쓰시마번이나 에도 막부를 비롯해 최근의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에도 행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을 사료에서 구체적으로 보기로 한다.
쓰시마번의 亀다케시마 기사亁는 조선에서 받은 위의 서한을
기록한 기사에서 乪인질乫인 안용복 등의 에도 행을 부정하는 견해를
이렇게 적었다.[48]
인질 두 명은 에도로는 안 갔지만,
(조선의) 서한에
이렇게 기재된 것은 두 명이 나가사키를 에도와 착각해,
조선에 돌아가서 에도에 보내졌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쓰시마번은 서한을 받은 직후에는 안용복 등이 나가사키를 에도로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교섭 과정에서 안용복 등은 乬이나바의 성부(忛晎)를 에도와 착각한 데서 일이 생긴 것 같다乭고 생각을 바꾸었다.[49] 이 견해는 겐로쿠 8(1695)년 12월에 쓰시마 번주의 후견인(屻尒恖)인 소우 교부타이후(廆孻晹戝曘)[50]가 에도로 갔을 때 제출한 乪구상지각(岥忋擵鍿)乫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51]
제작년에 다케시마에서 유치된 조선인 2명을
그 나라로 돌려보냈는데, 어민들은 이나바부(場敠晎)를 에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동부(搶晹, 에도)에서 나가시키까지 보내졌던 도중에 좋은 접대를 받았는데, 쓰시마노카미(洈攏庣)에게 간 이후 경호를 엄하게 받으면서 송환에
이르게 된 일에 대해서는, 상부의 생각과는 달리 쓰시마노카미의 사견으로 이렇게 다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 나라에서는 다시는 다케시마로 조선인이 가지 않도록 요청한 것도 역시 쓰시마노카미의 사견으로 요청한 것이라고 그릇된
추측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7) 나가사키(挿嶈)에서의
안용복
1693년
6월 30일
돗토리번의 사자는 안용복 등을 데리고 무사히 나가사키로 도착했다. 그것을 亀다케시마 기사亁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52]
조선인 두 명이 5월 7일에 이나바 (場敠)를 출발. 6월 그믐에 나가사키에 도착. 이나바에서 호송해 온 사자는 마쓰다이라 호키노카미의 가신 야마다 요자에몬 (嶳揷鋙嵍塹栧)과 히라이 진우에몬(暯堜恟塃塹栧). 총인원 약 십여명이 수행했다.[53] 조선인은 가마에 태워 보내졌다.
이 기사에서도 안용복 등은 가마에 태워져서 보내진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얼마나 대우를
잘 받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도착한 다음 날에 나가사키 부교 관아에서 가와구치 셋쓰노카미(愳岥潗捗庣)와 야마오카 쓰시마노카미(嶳壀洈搰庣) 두 명의 부교가 참석해, 쓰시마번의 나가사키 루수이야쿠(棷庣嫃栶)인 하마다 겐베에 (郷揷尮暫塹)가 같은
번의 역관을 통해 안용복 등을 심문했다. 그 때 안용복 등이 구술한 내용은 돗토리번이 작성한 乪조선인 구술서乫와 틀린 점이 없는지 조사됐다. 구체적으로는
안용복의 나이가 문제되었다. 돗토리번의 문서에서는 43세라
되어 있는데, 나가시키에서는 40세라고
했으므로 그 차이를 추궁받았다.[54] 안용복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면밀히 점검받은 뒤에
乪조선인
2인 진술乫이 아래와
같이 만들어졌다.[55]丅
1. 조선국
경상북도 동래군 부산포의 안요쿠호키와 울산의 박토라히라는 자입니다. 우리들은 울산이라는 곳에서 다케시마라는
곳으로 전복이나 미역을 따러 3월 11일에 출범해 25일에 영해(擩奀)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영해를 27일 아침 진(扖)시에 출발해 유(撗)시에 다케시마로 도착했습니다. 전복이나 미역을 따려고 머물고 있었는데, 일본인이 4월 17일에 우리들이 있는 곳에 와서 옷과 보따리를
가지고 우리 둘을 그들의 배에 태우고 즉각 오 (屵)시에 출범하고, 돗토리에는 5월 1일 미(枹)시에 도착했습니다. 항상 다케시마에는 전복이나 미역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배에 열 명이 타고 영해까지 왔는데
10명 중의 한 사람이 병들었으므로 영해에 내려두고 아홉
명이 타고 다케시마로 왔습니다. 열 명 중 아홉 명은 울산사람 한 명은 부산포 사람입니다.
1. 우리들이
탄 배와 유선(類慏)은 세 척이고, 그 중 한 척은 전라도의 배라고 들었습니다.
그 인원은 17명이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 척은 15명이
탔고 경상도의 가덕(壛)이란 곳의 사람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일본 배에 잡혀 왔으므로, 그들이
즉각 조선에 돌아갔는지 전후의 일은 모릅니다.
1. 이번에
우리가 전복을 따러 온 섬은 조선국에서는 무루구세무라 합니다. 일본 땅 다케시마라고 불린다는 것은 이번에
알았습니다.
1. 이번에
여기까지 올 때 경호하는 사람들에게 접대를 잘 받고 왔습니다. 옷감이나 목면, 의류 등도 받았습니다. 상세한 것은 이나바에서 구상서에 말한 바와 그대로입니다.
1. 우리들은
언제나 좋은 운수를 빕니다.
1. 바쿠토라히는 34세, 안요쿠호키는 40세입니다. 그런데 이나바에서 43세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아 틀리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공술을 한 시기는 나가사키에 도착한 다음 날인데, 안용복은 이동 중의 대우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취조에 대해 아무 거리낌없이 진술했다고 볼 수 있다. 공술 중에서 안용복은 그들이 전복을 딴 섬을 무루구세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것이
일본에서 다케시마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우산도에 관한 것은 乪조선인 2인 진술乫에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안용복 들이 무릉도 등에 관해 영토 주장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또 안용복 등이 돗토리번에서 영토 주장을 했다는 기술도 보이지 않는다. 심문
때 안용복 등이 가지고 있는 물건의 검사가 이루어져 돗토리번에서 받은 물건이 기록되었는데, 그 속에亀동국문헌비고亁가
말하는 돗토리번 태수의 乪서계乫 등은 없었다.[56]
이 乪조선인 2인 진술乫은 돗토리번의 구상서와 어긋나는 점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안용복 등은 쓰시마번의 하마다 겐베에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막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안용복 등을 완전히 쓰시마번에 이송하는 것은 보류되었다. 원칙적으로 나가사키 부교 관아의 관할 하에 놓여졌던 것이다.
(8) 쓰시마번(洈攏斔)에서의 안용복
1693년
8월 13일에
에도 막부에서 조선인을 쓰시마번으로 넘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나가사키 부교는 안용복 등을 완전히 쓰시마번으로 넘겼다. 그 때 부교는 이번에는 보통의
조선 어민과는 다르므로 나가사키 체재중의 비용은 내지 않을 것을 통고했다.[57] 안용복 등을 표류민이 아닌, 일본의 영역을 침입한 죄인 취급을
한 것 같다. 9월 2일에 안용복 등은 쓰시마부로 보내졌다. 일설에는 안용복이 탄 배가 9월 3일에 쓰시마에 도착했다고 한다.[58] 9월 4일, 안용복은 바로 쓰시마번의 조사를
받았다.
그 때의
안용복의 공술 내용은 나가사키에서의 乪조선인 2인 진술乫과 대부분 비슷하지만 다음과 같이 새로운 공술이
더해졌다.[59]
丒 배에 탄 아홉 명의 이름이나
출신지.
안용복
이외는 울산 출신.
丒 영해와 무루구세무(무릉도)간의 거리는 50리(200km).
丒 작년, 울산의 긴바타이등 20명이 그 섬으로 건너갔다. 이번에는 긴바타이의 안내로왔다.
丒 경상도 가덕의 배는 두 명이 예전에
온 적이 있다.
丒 그 섬(무릉도)이 일본 것인지, 조선 땅인지는 전혀 모른다.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땅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丒 돗토리를 출발해 26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도중 곳곳에서 좋은 접대를 받았다. 밥은 된장국에 7, 8접시의 요리가 나왔다. 둘 다 가마에 태워져 나가시키에
왔다.
마지막 항목에서 乬돗토리를
출발해乭라 되고 있지만, 이것은 안용복의 진술이 아니라, 필기자의 지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안용복 자신은 나가사키로 올 때의 출발 지점을 돗토리가
아니라 에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중에서 성대한 접대를 받았던 것은 에도 乪관백乫의 은혜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좋은 대우가 돌변해, 쓰시마번에서 안용복 등은 냉대 받고 조선인 숙소에서 엄한 감시하에 놓여 외출도 금지되었다. 심지어 쓰시마번은 안용복 등을 乪인질乫로 삼아 조선에 보낸 서한에도 그렇게 표현했다.[60] 안용복 자신도 귀국 후에 쓰시마에서 결박 당했다고 공술 했다.[61] 안용복은 쓰시마번의 학대를 견디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3년 후에 자청해 도일을 결심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이다.
안용복을 심문한 직후 쓰시마번 내부에서는 막부가 내린 명령의 배후에 관해 의심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만약 막부가 다케시마를 호키국의 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일찍이 다케시마에서 야자에몬
등을 잡는 것은 호키국에 명령했을 것이다.[62]
이를 쓰시마번에 명령한 것은 막부가 다케시마를 조선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를 막부에 문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덴류인(揤棿堾, 廆媊崃)에서 그의 측근인 가노 고노수케(壛擺岾擵彆)를 통해 제출되었다.[63] 그러나 그 때의 중론은 막부의
명령은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었고, 그 이상의 의논은 없었다. 쓰시마번으로서도 막부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설령 다케시마가 조선 땅이라 해도
명령에 따라 그 섬에 조선인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도록 조선에 요구하는 방침을 결정했던 것이다.
3.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
(1) 乫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의 개시
1693년
11월 1일, 쓰시마번의 가로인 다다 요자에몬(懡揷鋙嵍塹栧, 媖崃廳)은 안용복 등을 연행해 부산의 절영도에 도착한 뒤, 다음 날 왜관에 들어갔다. 다다는 공의(岞媀, 막부)의 명이라는 명분으로, 꺼려하는 동래부를 설득해, 대차사(戝嵎巊, 嵎榒) 정관(惓姱)의 자격으로 乪다케시마
일건乫 제1차 교섭에 임했다. 이에
대해 조정은 대차사와 동격인 접위관(愙堅姱)으로 홍문관 교리의 홍중하(峖廳壞)를 중앙에서 임시로 파견해, 동래부사와
함께 교섭에 임하도록 했다. 양자의 회담은 12월 10일 왜관에서 열려, 그 때 안용복 등이 조선측으로 인도 되었다. 그 자리에서 다다는 쓰시마 번주인 소우 요시쓰구(廆媊椣)의 서간을 넘겨 주었다. 그 내용은 작년에 이어 조선의 어민들이 일본의 다케시마에서 어렵를 했으므로, 그 어민 두 명을 구속해 증거를 위한 인질로 삼았다고 말하고, 막부의
명에 따라 그 어민을 돌려보내고, 앞으로는 조선인이 다케시마에 왕래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64]
이에 대해, 조선측은
어민에게 乪폐경지울릉도(暰嫬擵塗椝搰)乫등 외양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실상과, 어민이 일본의 다케시마로 들어간 것을 우호의
정으로 돌려 보낸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
어민이 풍랑을 만났을 때는 표류할 수 있다는 것, 멀리 국경을 넘어 뒤섞여 고기잡이를 하는 것은 법으로 징계할 일이라는 것, 바야흐로
범인을 법률에 의거해 징계하려 했던 것, 이후에는 처벌을 엄하게 하고 단속할 것 등을 쓴 회답서를 보냈다.[65]
이 때 조정은 마치 다케시마와 울릉도가 다른 섬인 것 처럼 써서 회답을 했는데, 이것은 유화(桮榓)정책 때문이었을 뿐, 처음부터 다케시마와 울릉도가 같은 섬이라는 것을 알면서 회답한 것이다. 조정은
이제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섬 때문에 일본과의 우호가 손상되는 것을 우려하는 한편, 울릉도에
일본인이 살게 되는 것도 걱정이었다. 그러므로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을 남기는 방침 아래[66] 홍준하 등은 궁여지책으로 다케시마와 울릉도가 다른 섬인 것 처럼 꾸미는 2도 2명책(擇搰擇柤嶔)을 궁리해내어, 회답서에 乪폐경지울릉도乫의 구절을
넣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취지를 쓰시마번에게 예고까지 하고 있었다. 접위관의 시나리오를 미리 파악한 정관 다다 요자에몬은 회담에서 조선의 유화정책을 일축하고, 다케시마 즉 울릉도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영토가 되었으니, 조선인의
섬 왕래를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다음과 같은 강경한 주장을 했다.[67]
쓰시마번은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계속적인 지배를 주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울릉도를 조선 땅이라고 하는 乪폐경지울릉도乫라고 쓰인
조선의 서한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이 구절의 삭제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 간에 응수가 이어졌지만 교섭이 결렬되어, 1694년 2월 22일, 다다 요자에몬은 왜관을 떠나 귀국했다.[68] 그 때문에 임시 직책의 접위관 홍중하도 그 임무를 마치고, 제1차 교섭이 끝났다.
그러나 다다는 윤 5월 13일에 다시 대차사(차왜)의 자격으로 왜관에 왔다.[69] 그 목적은 문제가 되었던 乪폐경지울릉도乫 구절의
삭제를 요구하는 쓰시마 번주 소우 요시쓰구의 서간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조선에서 받은 서한을 납득할 수 없다고 해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접위관으로 유집일이 임명되어
제2차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 교섭에서 조정은 그 때까지 울릉도와
다케시마를 2도
2명으로 하던 방침을 전환해, 다케시마와 울릉도는 1도 2명이고 조선 땅이라는 예조참판의 서한을 차왜에게
넘겼다. 그 서한의 후반 부분에서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 금지를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70]
우리 나라 백성이 어채(嫏嵦)하던 땅은 본시 울릉도로서, 대나무가 생산되기 때문에 더러 抾搰라고도 하는데, 이는 곧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의
섬을 두가지 이름으로 부른 상황은 단지 우리 나라 서적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귀주(婱廈)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서계(彂宊) 가운데 抾搰를 귀국 지방이라 해 우리 나라로 하여금 어선(嫏慏)이 다시 나가는 것을 금지하려 했고, 귀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지경을 침범해 와 우리 나라 백성을 붙잡아간 잘못은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 성신(惤怣)의 도리에 흠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바라건데, 이와 같은
뜻을 동도(搶搒)에 전보(鐉曬)해, 귀국의 변방 해안(奀娸) 사람들을 거듭 단속하여 울릉도에 오가며 또다시 사단을 야기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서로 좋게 지내는 의리에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이 서한을 보고 다다 요자에몬들은 놀랐다. 조선의 지난번의 서한과 전혀 달라 갑자기 일본인의 섬 왕래 금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쓰시마번은
조선이 이렇게 방침을 바꾼 배경에 안용복의 영향이 있다고 보고 다음과 같이 짐작했다.[71]
계유(1693)년의 서한과 갑술(1694)년의 서한 내용이 유난히 다른 이유는 다케시마로 나간 조선 어민들을 불러 조정이 직접 물었더니, 그들의 말로는 다케시마에서 줄에 묶여 죄인 취급을 받고 에도에 보내졌는데, 에도의
관아에서는 태도가 돌변하여, 그런 취급을 한 것은 엄청난 실수라 하면서, 그들을 잡은 자들에게 참죄(巃嵾)를 명하고, 우리들에게는 의복을 주시어 정중하게 접대해 주고 나가사키까지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가마에 태워 주시고, 좌우로부터 부채질을 해주고, 금은을
주시는 등, 극진히 대접을 받았는데, 나가사키에서
다이슈(洈廈,
쓰시마번을 말함)의 관원들에게 인계된 후, 다시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죄인처럼 다루고 다시 그 섬으로 왕래하지 않도록 한 것은 에도의 마음이
아니고 그저 쓰시마의 마음이라고 말하니, 조정은 실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 후부터는
쓰시마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공명(岞柦)이 아니라고 이해해 乬(일본인이) 월경, 침입이라든가, 성신(惤怣)이 모자라다乭등의 글을 쓰는 듯 합니다. 그 어민들의
이야기에서 이해한 것이므로, 갑술의 회답서 중에 乬의외에도
귀국 사람들이 멋대로 침범해 서로 충돌하게 되자,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을 끌고 에도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다행히도 귀국의 대군이 충분히
사정을 살펴주시어 많은 노자를 주어 보냈습니다乭라고 되어 있는 것은 그 취지에 어울리므로, 어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정은 직접 그
취지를 썼다고 생각됩니다. 이나바의 성부(忛晎)를 에도로 착각한 데서 이러한
일이 시작되었다고 의심이 가니, 이것을 충분히 밝히면 앞으로는 납득하여 적절한 회답서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안용복이 이나바국을 에도로 착각했다는 것에 관해서는 앞에 쓴 대로인데, 안용복은
그 乪에도乫
즉 이나바국에서는 잘 접대를 받았는데 쓰시마번에서 갑자기
죄인 취급을 당한 것은 막부의 명이 아니라, 쓰시마번이 제멋대로 한 것이라는 안용복의 공술이 조정에서 거의 신용되었다. 그래서 안용복의 진술이 조정을 움직였던 것 같다. 亀숙종실록亁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72]
틀림없이 안용복과 박어둔이 처음 일본에 갔을 적에는 매우 대우를 잘받았다. 의복과 호초(層灒), 그리고 초[怌]를 주어 보냈고, 또한 모든 섬에 이문(堏暥)해 쓸데없는 간섭을 못하게 했는데, 나가사키섬에서부터 침책(怤愑)이 시작 되었다. 쓰시마번주의 서계에서 抾搰에 관해 설득하고 있는 것은, 장차 에도에서
공을 세우기 위한 계책이었던 것이다. 유집일이 안용복에게 물어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용복이 말한, 쓰시마번의 乬에도에
공을 세우기 위한 계책乭이란 견해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맞다고 할 수 있다. 쓰시마번은 막부의 명령 이상의 일을 독선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의
명령은 다만 다케시마에 조선인이 오지 않도록 요구하는 것에 불과했다. 더구나 조선이 그것을 받아드린다고 서한으로
약속했으니, 형식상으로는 막부의 명령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쓰시마번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조선의 서한에 乪폐경지울릉도乫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트집 잡아, 다케시마는 바로 울릉도이고 임진왜란 이후로는 일본의 지배지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울릉도 지배를 조선에게 억지로 인정시키기 위해 독단적으로 행했다. 이것이야말로
쓰시마번이 乬에도에 공을 과시하기 위한 계책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쓰시마번의 계책에 조정이 반발하게 된 것은 안용복의 공술이 계기가 된 것이다.
조선의 강경한 서한에 대해 쓰시마번은 본격적으로 반론을 시작했다. 1695년
5월 15일에 조선의 서한에 대한 4개 조의
의문점을 동래부에 제시해, 5월 30일까지 회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태도를 단단히 굳힌 조선에서 회답을 얻지 못하자, 다다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6월 10일에 왜관을 떠났다. 이렇게
제2차 교섭은 끝이 났다. 이후 쓰시마번에서 이 문제 때문에 대차사가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
(2) 乫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의 전환
다다의 귀국 후에 쓰시마번 내부에서 강경 노선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나중에 乪다케시마일건乫의 해결에
크게 이바지한 온건파의 쓰야마 쇼우에몬(摡嶳彲塃塹栧)은 타국의
섬을 억지로 빼앗아 에도의 공의(岞媀)로 바치는 방법은 乪불의(晄媊)라 말할 수 있어도 충공(拤岟)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乫고 비판했다.[73] 바로 안용복이 말하는 乬에도에 공을 과시하기 위한 계책乭 비판과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쓰시마번은 조선과의 교섭이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자, 소우 요시자네와 쓰시마 현지 가로인 히라타 나오우에몬(暯揷捈塃塹栧) 등이 에도로 가서 막부와 협의를 시작했다. 1695년 11월 25일에 히라타는 로주인 아베 분고노카미(垻晹朙屻庣)의 가신인 미사와 기치자에몬(嶰郪媑嵍塹栧)과 면담하여 지금까지의 경위를 설명했다.[74] 그리고 보충 자료로서 소우 요시자네의 구상서와 조선과의 왕복 서한, 亀여지승란亁과
亀지봉유설亁등의 문헌을 제출했다.
이것을 계기로 막부는 다케시마에 관한 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12월 24일, 아베는 돗토리번의 에도 번저(斔揁)에게 7개 조의 질문을 했다. 그 제1조에서 乬인슈(場廈), 하쿠슈(攲廈)에 부속한 다케시마는 언제부터 양국에 속했습니까?乭라고 질문했다. 막부로서는 다케시마가 틀림없이 이나바국과 호키국을 지배하는 돗토리번에 소속하는 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는 7, 80년 전의 乪잠상(郔彜)사건乫 때 다케시마를 조선영토라고 판단한 역사가
첵계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돗토리번의 회답은 乬다케시마는
이나바와 호키의 소속은 아닙니다乭라고 하여 돗토리번의 영토가 아님을 단언했다. 더 중요한 것은 제7조에서 乬다케시마
이외에 양국에 속하는 섬이 있습니까?乭라고 막부가 질문한 것이다. 이에
대한 돗토리번의 회답은 乬다케시마나 마쓰시마, 그 외에
양국에 속하는 섬은 없습니다乭라고 하여 다케시마와 함께 마쓰시마에 관해서도 돗토리번에 부속하는 것이 아님을 명언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막부는 마쓰시마(독도)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 이름이 나온 마쓰시마에 관심을 가지고 그 위치나 소속, 도해의
실상 등에 관해 추가 질문을 했던 것이다.[75]
막부는 돗토리번이 다케시마는 자기 영토가 아니다라고 회답했기 때문에 그 섬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쓰시마번과 협의했다. 1696년 1월 28일에 로주 4명이 나란히 참석한 자리에서 로주 도다 야마시로노카미(戶揷嶳忛庣)가 쓰시마의 덴류인(揤棿堾, 廆媊崃)에게 각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요나고 백성의 다케시마 도해 금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76]
구상의 각서
오래 전부터 호키 요나고의 백성 2명이 다케시마로 도해해 지금까지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조선인도 그 섬에 와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섞이는 것은 이익이 없으므로 앞으로 요나고 백성의 도해를 금지할 것을 (장군이) 분부하셨습니다. 마쓰다이라
호키노카미에게도 봉서(曭彂)로 알렸습니다. 그것을 명심하도록 명합니다.
같은 날 로주 4명이 서명한 다케시마 도해 금지의 봉서(曭彂)가 에도의 돗토리 번저에게 넘겼다.[77] 그로 인해 돗토리 번주에게 발행된 막부의 다케시마 도해 허가증은 2월 9일에 막부에 반납되었다.[78] 그러나 돗토리 현지에 다케시마 도해 금지의 봉서가 전달된 것은 8월 1일이었다. 전달이 반년이나 늦은 이유는 로주 오쿠보 가가노카미(戝媣曐壛夑庣)로부터 돗토리 번주가 귀국해 직접 현지에 전달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위를 乪고요닌 닛키乫 8월 1일조는 이렇게 적었다[79]
하쿠슈우 요나고의 백성 무라카와 이치베에 (懞愳巗暫塹)와 오야 진키치 (戝扟恟媑)에게 앞으로 다케시마 도해의 일을 금지한다고 (막부가) 명했음을 예전에 (번주가) 에도에 있었을 적에 봉서로 내리셨고, (번주가) 귀국하시고 이 일을 이치베에와 진기치에게 명하라는 오쿠보 가가노카미(戝媣曐壛夑庣)의 지시에 따라, 오늘
금지의 뜻을 명했습니다.
로주가 전달의 시기를 늦춘 이유는 쓰시마번의 요청을 다소 배려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쓰시마번은 乪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에서
조선에 대해 조선인의 다케시마 도해 금지를 요구 중이고,
그 와중에 막부에 의한 일본인의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이 쓰시마번
이외에서 조선에 알려지면 쓰시마번의 입장이 곤란할 수 있으므로, 소우 요시자네가 막부에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의
공개를 늦추도록 요청했던 것이다.[80]
(3) 乪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의 해결
에도 막부에 의한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은 바로 조선에 전달되지 않았다. 쓰시마번은
乪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이 암초에 부딪친 가운데, 그것을 어떻게 조선에 전달할 것인지 고민했던 것이다. 그때까지의 쓰시마번은 조선인의 도해금지를
요구하고 수 년 간이나 조선과 힘든 교섭을 계속해 왔지만,
막부의 결정은 일본인의 도해금지이고 쓰시마번의 요구와는 반대의
결론이므로 그것을 쉽게 조선에 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의
교섭이 쓰시마번이 독단적으로 한 것이고, 막부의 명령에 거슬러 행동을 한 것이라는 비난을 조선에서 받을 우려가 있다. 그러한 중에 안영복의 제2차 도일이 행해진 것이였다. 안영복
문제와 함게 乪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의
해결이 급하게 되었다. 쓰시마번은 막부와 협의 하여, 로주의
乬가볍게 끝내도록乭하라는 의향을 받아들여 일본인의 도해금지를
구두(岥摢)로 전달하기로 했다. 쓰시마번의
요구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전달하므로 정식 문서를 보내는 것을 주저한 결과였다.
도해금지를 가볍게 구두로 전하는 것은 조선에서 도해(搉奀) 역관사가 쓰시마로 파견된 기회를 이용했다.
10월 16일에
소우 요시자네는 쓰시마에 와 있던 조선의 도해 역관인 변동지와 송판사를 불러 구두로 막부의 결정을 전달했다. 게다가 그것을 구상서로 해서 두 역관에게 건네 주었다. 동시에 안영복 등이 쓰시마번을 경유하지
않고 돗토리번으로 소송하러 온 사실을 추궁하는 구상서도 건넸다. 그러나 일본어의 구상서는 乬낙착을 보기 어렵다乭는 역관의 의견으로 인해, 두 통의
구상서를 한문으로 바꾸어, 도시요리(年婑)들이 서명 날인한 뒤 역관에게 건넸다.
다만 수신인은 적지 않았다. 이 도시요리들이란 여섯 명의 가로를 가리킨다. 이 서류에 대해 변동지와 송판사의 회답서에는
수기무라 우네메 등 6명의 가로 앞으로 보내졌다. 쓰시마번의
도해금지를 알리는 한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81]
전임 태수(懢庣)가 抾搰의 일로 인해 사절을 귀국에 파견한 것이 두 차례인데 사절의 일이 완료되지 않은 채 별세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사절을 소환했습니다.
(廆媊崃이) 머지 않아 상선(忋慏)해서 (峕戶에) 입관(擖鎂)했을 때에 (老拞의) 질문이 抾搰의 지형과 방향에 미쳐서 사실에 근거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본방(杮朚)으로부터의 거리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나, 오히려 귀국으로부터의 거리는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마도 두 나라 사람들이 (그곳에서) 섞이면 잠통(郔捠)과 사시(巹巗)등의 폐단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곧 명령을 내려 사람들이 가서 어채(嫏嵦)하는 것을 불허했습니다.
무릇 틈의 벌어지는 것은 세미(嵶旝)한 곳에서 생기고 화환(壭姵)은 하찮은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 고금의 통병(捠昦)이니, 미리 못 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됩니다. 이로써
100년의 우호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하니, 하나의 섬 등에 불과한 작은 일을 곧바로 다투지 않는 것이 두 나라의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남궁(撿媨, 예조)이 응해 정성스럽게 수서(廋彂)해서, 본주(洈廈)로 하여금 (조선 측의) 큰 감사를
대신 (峕戶에)
전하게 할 것이며, 역사(妗巊)가 귀국하는 날을 기다려 (이 뜻을) 아뢰어 빠뜨리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쓰시마번은 다케시마까지의 거리는 조선쪽이 더 가깝다는 것과, 그 섬에
조선과 일본 어민이 난입하여 밀무역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일본인의
도해금지를 공식으로 알렸다. 이 중요 문서는 메이지 시대에 내무성이 다케시마의 귀속문제를 조사했을 때에도 인용되었다.[82]
이 문서를 조선에 넘김으로써 乪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은 거의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역관인
변동지와 송판사는 1697년 1월에 귀국했으므로,[83]
조정에 일본인의 도해금지가 전달 된 것은 그 이후이다.
4. 안용복의 제2차 도일사건
(1) 울릉도로의 도항
1696년 안용복은 자청해서 제2차 도일을
했다. 그 행적을 도판2에 표시했다. 그는 울릉도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
귀국 후 비변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84]
저는 본디 동래에 사는데, 어미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마침 중(憁) 뇌헌(棆寷) 등을 만나 근년에 울릉도에 왕래한 일을 자세히 말하고 나서 그 섬에 해물(奀暔)이 많다는 것을 말했더니, 뇌헌
등이 이롭게 여겼습니다. 드디어 같이 배를 타고 영해 사는 뱃사공 유일부(棲擔晇) 등과 함께 떠나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庡嶳)인 삼봉(嶰曱)은 삼각산(嶰妏嶳)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했습니다.
안용복은 풍부한 해산물을 목적으로 울릉도로 갔다고 공술했지만, 그것은
목적의 하나이고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그의 행보를 일본의 사료에 의해 추적하기로 한다.
2005년에 발견된 오키도의 乪무라가미 가문 문서乫, 즉 亀겐로쿠 9 병자년 조선 배 착안 일권지각서(尦釸嬨暩巕擭 挬慛廙 拝娸 堦櫳擵鍿彂)亁에 의하면 안용복은 3월18일에 울릉도로 도착해, 약 2개월에 걸쳐 전복 등 해산물을 따고 있었다. 그러나 亀숙종실록亁에 실린 안용복의 공술에 의하면, 아래와 같이 안용복은 그 때 일본인의 배를
발견해서 그들을 꾸짖고 쫓아냈다고 한다.[85]
산에는 잡목(瓒栘)·매[戦]·까마귀·고양이가
많았고, 왜선(榒慏)도 많이 와서 정박해 있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했습니다. 제가 앞장 서 말했기를, 乬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했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해야 하겠다.乭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乬우리들은
본디 송도(徏搰)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杮強)로 돌아갈 것이다.乭라 하므로, 乬송도는
자산도(巕嶳搰)로서, 거기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왜 사는가?乭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달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亀동국문헌비고亁에도 기록되어 있는데,亀숙종실록亁에서는 송도를 乪자산도(巕嶳搰)乫라 했으나 亀동국문헌비고亁에서는 乪우산도(堭嶳搰)乫라 했다. 또한 亀숙종실록亁에는 乬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徏搰)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杮強)로 돌아갈 것이다乭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亀동국문헌비고亁에는 乬왜가 대답해 말하기를, 본래 송도로 향했는데 마침 돌아가려던
참이였다乭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문제는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과 만났는지의 여부인데, 이것은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사료에서는 관련 된 기사를 찾아 볼 수 없다. 또 일본의 일부 연구자는 이 해에
막부의 도해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이 해에는 다케시마로의 도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시모죠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안영복이 오키도에 밀항해 온 것은 1696년 5월 20일. 하지만 쓰시마번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에도 막부가 울릉도로의 도해 금지를 돗토리번에 명한 것은 4개월 정도 전인 1월 28일. 돗토리번 요나고의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에 전해 준 乪도해 면허乫가 막부에 반납된 것은 2월 9일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안영복이 울릉도에서 乬일본의 어민들과 만나서 일본에
건너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했다乭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86]
乪도해 면허乫가 반납된 것은 2월 9일임에 틀림 없지만, 도해 금지령이 돗토리번의 성부(忛晎)에 전달 된 것은 앞에 쓴 바
이 해
8월이었다. 따라서 이 해의 봄 시점에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은 도해 금지령을 모른 채 예년처럼 도해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해에 만약 안영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과 만났다면 그런 중대사는 안영복 등이 오키국에서 취조를 받았을 때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나 취조 기록인 乪무라카미 가문 문서 (懞忋壠暥彂)乫에는 그런 기술이 없다. 乪무리카미 가문 문서乫는 안용복의 공술을 충실히 기록한
신뢰도가 높은 자료인 만큼, 거기에 일본인과 만났다는 기사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러한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또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의 형편을 감안할 때, 이 해의 출어는 곤란했을 것 같다. 1692년 이래 4년 연속해 다케시마에서의 수확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1695년에 도해할 자금을 돗토리번으로부터 빌리려 했으나 거절 당했다.[87] 그 전 까지는 오야丒무라카와 양가문은 돗토리번으로부터 종종 도해자금으로서 은 10kg 정도를 빌렸었다. 그 해는 아마도 돗토리번이 대출금의
회수가 어려우므로 거절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가문은 1695년에 도해했지만, 이 해도 역시 다케시마에 조선인이
와 있었으므로, 거의 수확이 없는 상태로 귀국했다.[88]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양 가문의 재정 상태는 곤란한
상태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령 1696년에 도해했다고 하더라도, 섬에 조선인이 와 있을 가능성이 높고, 수확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696년에는 조선인 문제의 행방을 지켜보고
도해를 보류했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이 해에 안영복 등이 다케시마에서 일본인과 만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그 전년이라면 안영복 등이 울릉도에서
일본인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뒷부분에서 고찰하겠다.
(2) 오키국(塀婒殸)으로의 도항
5월 15일에 안영복 등은 울릉도를 출발해, 마쓰시마를 거쳐 오키도로 갔다. 그 경위를 안영복은 귀국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89]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해 옥기도(嬍婒搰)에 이르렀는데, 도주(搰庡)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乪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挬慛)의 지경으로 정하고, 관백(钀敀)의 서계(彂宊)도 받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掕幃)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乫 하자, 마땅히 백기주(攲闼廈)에 전보(鐉曬)하겠다고 했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안영복은 여기서도 3년 전의 乪관백의
서계乫에 대해 반복해 말하고 있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당시의 접위관 유집일의 견해는 이미 소개한 대로이다. 또 乬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해 옥기도에 이르렀는데乭 라는
공술은 해금(奀嬛)의 죄를 추궁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공술한 것이다. 乪무라카미 가문 문서乫는 안영복 등이 소송 목적으로 호키에 가는 도중에 오키도에 들렸다고 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안용복이 말하기를, 자신이 타고 있던 배의 열 한 명은 호키국에 가서 돗토리의 호키노카미님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가는 중입니다. 바람의 상태가 좋지 않아 이 땅에 들렸습니다. 순풍이 부는 대로, 호키국으로 가고자 합니다丒丒丒
안영복과 도라베 두 명은 4년 전의 유년(撗擭) 여름에, 다케시마에서 호키국의 배에 연행당했습니다. 그 도라베도 이번에 동행했습니다만 다케시마에 남겨 두고 왔습니다.
5월 21일 안영복 등은 쌀이 떨어졌음을 오키 당국에 호소했다. 그 이유는 오키를 경유 할 계획이 없었으나,
어쩔 수 없이 경유하게 되었으므로 식료가 닳아졌다고 설명했다. 안영복에게 마을의 쇼야(彲壆)가 쌀을 주었는데, 그 때에 쇼야는 소송 목적에 대해 적어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안용복은
일단은 양해했으나, 다음날 아침에 그것을 거부하고, 호키국에
가서 자세한 것을 말할 테니 두 번 다시 물어보지 말아달라는 문서를 보냈다. 22일에
그들은 배에서는 흔들려서 글을 적을 수 없으므로 상륙해 농가를 빌려 배 안에서 적어 두었던 것을 乪소송 1권乫으로서 정리했다. 그 내용은
안영복 등이 다케시마丒마쓰시마가
그려진 乽조선팔도지도(挬慛敧摴擵殼)乿를 지참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울릉도와 자산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 된다. 그것이 다음乽무라카미 가문 문서乿의 내용에서 짐작된다.
1. 안영복이 말하기를, 다케시마를
대나무섬이라고 하며 조선국 강원도 동래부 내에 울릉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을 대나무섬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팔도지도에 적어 갖고 있습니다.
1. 마쓰시마는 같은 도내에 자산(巕嶳)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둘 다 팔도지도에 쓰여 있습니다.
안용복은 다케시마丒마쓰시마의
위치에 대해 乬다케시마와 조선 사이는 30리 (120km), 다케시마와 마쓰시마 사이는 50리(200km)乭라고 말했으므로,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는 오늘날의 울릉도와
독도를 일컫는 것임에 틀림 없다. 乽무라카미 가문 문서乿에 기술 된 내용은 5월 23일에 끝났지만, 이 사료의
의의를 나이토 세이츄는 乬안영복이 다케시마丒마쓰시마가 조선의 영토라고 일본 측에 주장했다는 사실이 확인 되는 것은 亀조선왕조실록亁등의
한국측 사료가 아닌 오키에서의 이 문서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乭고 높이 평가 했다.[90]
(3) 돗토리번(捁庢斔)으로의 도항
오키국에 조선의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오키국을 다스리는 다이칸(戙姱)의 데다이(庤戙, 수하)로부터 돗토리번에 6월5일에 전달되었다.[91]
조선의 배가 호키국에 청이 있어서 도해했다고 하므로,[92]
돗토리번은 서둘러 메쓰케(栚晅, 감찰관)인 히라이 킨자에몬(暯堜嬥嵍塹栧)과 고오리 부교 (孲曭峴), 총무를 맡은 야마자키 슈마 (嶳嶈庡攏)
등을 불러모아 대책을 협의했다.[93]
동시에 번주가 체재하는 에도의 돗토리번저에게도 파발꾼을 시켜
이러한 사실을 전달했다. 번주는 막부에 그 취지를 쓴 구상서를 13일에
전했다.[94]
그 사이에 오키도를 출발 한 안영복 등은 6월 4일에 호키국의 아카자키(愒嶈)에 나타나서 동쪽을 향했다. 돗토리번에서 급파된 야마자키 슈마(嶳嶈庡攏)는 이나바국의 나가오바나(挿旜旲)에서 조선의 배를 만나, 그 배를 아오야(壆)마을에 끌어들였다. 그 때에 안용복 등은 배에 깃발을 달고 있었다. 아오야 마을의 주민이 깃발에 적힌 내용을
옮겨 적어 乬조울양도 감세장 신 안동지 기(挬塗兩搰 娔稅洅 恇 埨摨抦 婻)乭라고
기록했다.[95]
亀이나바 지 (場斔巙)亁는 乬조울양도는 울릉도 [일본에서 이것을 다케시마라 칭한다.] 우산도 [일본에서 마쓰시마라 칭한다.]乭라고 해석해 기록하고 있다. 또 乪우산도乫 옆에 乪우사무수무乫라는 토가 쓰여져 있었지만, 앞의 乪무라카미 가문 문서乫에서는 乪자산乫의 옆에 乪소우산乫이라는 토가 쓰여 있었다. 한편 亀숙종실록亁에 안용복의 공술에
乪자산도乫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안용복은
독도를 자산도라고 불렀다고 생각 된다.
아오야(壆) 마을에 정박 중인 안용복 등과 돗토리번의
히라이 킨자에몬은 만났으나, 그는 조선인과는 통역이 없어서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다.[96]
그러나 안용복은 오키국을 다스리는 다이칸의 데다이와는 충분한
대화가 가능했으므로, 대화가 불가능했다고 하는 보고는 이상하다. 사실은 안용복 등은 아오야에서 주민과도 교류해 壴揷 棝恑巑(이인성)가 마을 사람들에게 8장의 휘호(婗焲)마저 준 사실도 있었다.[97]
히라이 킨자에몬과 대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후일 에도 돗토리번저의 요시다 헤이마(媑揷暯攏)가 쓰시마번에게 乬안히챠쿠(안용복)는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일본어도 대체로 할 수 있습니다乭라고 말했다.[98]
돗토리번은 막부에 표면상 조선인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했으므로, 공문서에서는 그렇게 기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돗토리번은 다음에 유자(庲幰)인 쓰지 반안(捯斢埩)을 파견했다. 그는
센넨지(愮念帥)에서 안용복 등과 대담했다. 일설에
쓰지는 필담을 했다고 한다.[99] 쓰지는 조선인의 목적에 대해 乬다케시마의 소송이 목적인 것처럼은 들리지 않았다.乭고 번에게 보고했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의문이다. 그 동안
배에 있는 소지품이 조사되어, 그 기록이 에도 막부에게 보내졌다.[100] 그 문서를 보낼 때 안용복 등이 오키도에서 적은 乪소송 1권乫도 에도에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乪소송
1권乫이 아오야에서
내놓은 것인지 어떤지는 기록이 없으므로 확실하지 않다.
이 乪소송 1권乫은 亀숙종실록亁에 적힌 정단(掓歞)으로 보여진다. 안용복이 돗토리번에 정문(掓暥)한 일이 조정에서 높이 평가를
받았다.
亀숙종실록亁은
영부사 남구만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01]
영부사 남구만은 말하기를, 乪안용복이 계유년에 울릉도에 갔다가 왜인에게 잡혀 호키슈(攲闼廈)에 들어갔더니, 본주(杮廈)에서 울릉도는 영구히 조선에 속한다는 공문(岞暥)을 만들어 주고
증물(憽暔)도 많았는데, 쓰시마번을
거쳐서 나오는 길에 공문과 증물을 죄다 쓰시마 사람에게 빼앗겼다 하나, 그 말을 반드시 믿을 만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마는, 이제
안용복이 다시 호키슈에 가서 정문(掓暥)한 것을 보면 전의 말이 사실인 듯합니다. 안용복이
금령(嬛椷)을 무릅쓰고 다시 가서 사단(帠抂)을 일으킨 죄는 진실로 주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쓰시마의 왜인이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거짓 칭하고, 에도의 명이라 거짓으로 핑계대어 우리 나라에서 사람들이 울릉도에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려고 중간에서 속여 농간을 부린 정상이 이제 안용복 때문에 죄다 드러났으니, 이것은
또한 하나의 쾌사(夣帠)입니다.
안용복이 정문한 것은 쓰시마번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다. 1697년 2월에 쓰시마번은 동래부에 乬작년 겨울에 귀국 사람이 단자(歞巕)를 제출한 일이 있었는데, 조정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까?乭라고 물었다.[102] 안용복이 정서(掓彂)를 제출한 일은 에도 막부로부터 쓰시마번에
알려진 것 같다. 다만 정서의 내용은 亀숙종실록亁이나 亀다케시마 기사亁에도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질문에 대해 예조참의 이선부(棝慞燁)는 다음 해 3월의
회답서에서 乬그 정서는 참으로 망작(栂嶌)의 죄가 있다乭[103] 고 회답했다. 가령 안용복의 공이 있더라도, 외교상
쓰시마번에게는 표풍우민(昚晽嬸柉)이 한
것이며, 조정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조선인이 호키번에 왔다는 소식은 6월 22일에 에도의 돗토리 번저로부터 로주 오쿠보 가가노카미(戝媣曐壛夑庣)에게 전해졌다. 다음날 오쿠보가 쓰시마번의 어린 번주인 소우 지로우(廆師)에게 그 사실을 전했다. 이 때 오쿠보는 조선인이 이나바에 소송을 위해 왔다고 하면 이나바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오쿠보는 쓰시마번에게 돗토리번에 의하면 조선인이 말하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했으므로, 바로 통역을 돗토리번으로 보내길 바란다고 의뢰했다. 쓰시마번은
상세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루수이(棷庣嫃)인 수주키 한베에(楅栘敿暫塹)가 돗토리번 기키야쿠(暦栶)인 요시다 헤이마(媑揷暯攏)를 만나, 다음의 내용을 알아냈다.[104]
오키국에서 조선인 열 한 명이 배 한 척을 타고 와, 6월 4일에 호키에 도착했습니다. 그 중의 다섯 명은 출가한 사람입니다. 호키에
있는 가로가 이나바에 서둘러 전달해 왔습니다. 선대 때부터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다루지 않고 나가카시 부교 관아에 보내도록 명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나바에 갈 필요가 없다고 들려주자, 화를
내며 장대로 여기 있는 자를 때려 눕히고, 다케시마에는 우리보다도 먼저 온 조선의 배가 30척 정도 와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 5일에 조선인을 이나바에 남겨 두었습니다. 열 한 명 중 예전에 다케시마에 온 적이 있는 안히차쿠는 모든 사정을 다 잘 알고 있었으며, 일본어도 대체로 가능합니다.
소송에 관해서는 그 쪽에 관련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가노카미님에게는 당신네들의 일은 말하기 어려우므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해 가가노카미님이 생각하기를 필담이라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필담은
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으시기에, 필담을 했다면 소송을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필담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여간 당신네들의 일이므로 모쪼록 이나바에 역관을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예전에 안히챠쿠가 다케시마에 왔을 때 그쪽 지방이나
조선에서 속박 당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그러한 말을 했습니다. 하여간 그 쪽의 일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데, 수즈키 한베에는 아직껏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므로, 앞으로
조선인이 돗토리 관아에 오는 대로, 그리고 외국의 배에 대해 선대에 주신 봉서(曭彂)를 옮겨 적게 해주십사 청하고, 돌아왔습니다.
돗토리번은 안용복등의 소송목적을 다케시마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쓰시마번에
관계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고 있으나, 돗토리번이 소송은 나가사키만으로 한정한다는 자세를 시종일관 취했다고 한다면, 쓰시마번에 대해서는 체면상 안용복의 소송내용을 듣지 않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또 돗토리번은
3년 전 선대의 번주인 이케다 미쓰나카(抮揷岝拠)의 시대, 안용복을 연행한 사건에 대해 로주인 오쿠보 가가노카미부터 乪이국(堎殸)의 배에 관한 규정의 봉서乫를 받고
있었다.[105] 쓰시마번이 옮겨 적은 봉서는 그것을 가르키는 것 같다. 쓰시마번에서 소우 요시자네는 소송목적을
乬예전에 다케시마에 왔던 안히챠쿠라는 사람이 타고 왔다고 하므로 틀립없이 다케시마에 관한 소송일
것이다乭고 상정하고 있었다.[106]
한편 돗토리번에서 안용복은 쓰시마번과 부산의 왜관에서 결박 당한 일 등을 말한 듯하지만, 쓰시마번의 행실을 밝히는 것도 소송의 목적 중의 하나였던 것같다. 그러나
소송의 본래의 목적은 배의 깃발에 적혀 있던 乪조울 양도 감세장乫이란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울릉도와 자산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알리고,
쓰시마번이 두 섬을 일본의 지배 아래에 두려는 계책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때문에 조선을 출항하기 전에 乪조선팔도지도乫를 준비하고, 출발 할 때 지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서술하겠다.
6월 14일에 안용복 등은 야마자키 슈마 등에 의해 아오야로부터 가로(壛楬, 夑業乯의 도젠지乮搶釽帥乯에 옮겨졌다.[107] 그러나 로주 오쿠보 가가노카미는 그들을 도젠지에 두는 것을 乬소용 없는
일乭이라 하여 금하고, 배 안에서 머물도록 지시했다.[108] 그러나 그 지시가 돗토리성부에 전달되는 사이에 돗토리번은 안용복 등을 조선국의 사자로서의 대우를 하며 돗토리성하의 조회소(挰橉強)에서 접대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상황을 亀다케시마 고(峫)亁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국 사자의 배(巊敃)을 본 번(杮斔)으로 통하다
겐로쿠(尦祿) 9년 6월 4일, 호키국 아카자키나다(愒嶈撳)에 조선의 배가 도착했다丒丒丒6월 21일에 전마(橞攏) 9마리를 보내고, 토다
이치우에몬(戶揷巗塃僄栧), 마키노 이치로우에몬(杚栰巗塃僄栧),
오카지마 도베에(壀搱摗暫塹)가 가는 길을 경고했으며, 외국
손님들을 본부(杮晎)의 정회소(挰橉強)에 두고, 머물러
있는 동안의 접대를 우바라 덴고베에(塇尨鐉屲暫塹)에게 명했다.
한편 안용복 등을 조선의 사자로서 대접했다는 기록은 번의 공식기록에서는 볼 수 없다. 亀다케시마
고亁의
기술이 옳다면, 돗토리번은 로주의 지시에 어긋나는 대접을 했을 뿐 아니라, 안용복의 복장과 관명 사칭에 속아 조선의 사자로
착각한 것이 되므로 그러한 기록을 공식적으로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고 보인다.
얼마 되지 않아 로주의 乬조선인을
절에 두는 것은 소용없는 일乭이라는 지시가 현지에 전달되어, 그들의
배를 고야마(巕嶳,
屛嶳)호수로 끌어 들여 안용복 등을 호수 안의
아오시마(搰)에 가두었다. 7월
22일에 와다 세베에乮榓揷鸓暫塹乯가 고야마 호수에 있는 조선인의 작회인(嶌夢恖)을 명령 받았으므로,[109] 이 때에 안용복 등은 코야마 호수로
끌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 3일전에는 에도에 체재하고 있었던 번주 이케다 츠나키요(抮揷峧鸆)가 돗토리부에 귀국했다. 번주는 에도 체재 중에 로주로부터
조선인을 추방하라는 명을 받았기 때문에, 갇혀 있던 안용복 등과 만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막부는 조선인을 추방한다는 결정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나 방침을 바꿨다. 처음에는 이나바에서 조선인의 소송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던 로주 오쿠보도 다음날 24일에는 생각을 바꾸었다. 모든 소송은 나가사키 부교가 다루므로 조선인을
나가사키로 보낼 것, 만약에 나가사키에 가지 않는다면 돌려 보내라는 지시를 돗토리번의 요시다 헤이마와 쓰시마번의 수주키 한베에(楅栘敿暫塹), 두 사람에게 전했다.[110] 이에 대해 쓰시마번은 안용복 등을
직접 추방시킬 것을 로주에게 진언했다. 그 이유가 亀다케시마 기사亁에 기술되어 있는데,[111] 그것을 이케우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112]
(조선인이) 이나바를 향해 도해해 온 것과, 몇 해 전에 다케시마(울릉도)에 왔던 안히챠쿠(안용복)가 일행 중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번의
도항목적은 乪다케시마의 소송乫인지도 모르겠다(a). 이미 조선측이 납득 할만한 일본인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이 막부 명령으로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조선에게는 전달하지 않고 있다.
만약 여기서 안용복의 소송이 다케시마 일건에 관계된 것이고, 그런 소송을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조선측은 일본인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을 안용복의 소송 행위에 인해 이긴것으로 오해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조(擔挬)간에 다툼이 생길 때마다 직접 건너와 소송을
일으켜 해결하려는 사람도 나타날 것이다(b). 그렇게 되면 일조간을 중계하는 쓰시마번의 존재 의의가 크게 손상될 것이다(c).
조선에서 일본에 무슨 용건이 있을 경우에는 쓰시마번을 통해야 하고, 다른
나라(번)에는 직접 거래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번)에 소송하는 등의 예는 여태까지 없었다(d). 본래 용건이 있을 때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으로 되어 있는 쓰시마번에 말 한마다 없이 직접 다른
곳(돗토리번)에 소송을 하는 등의 행위가 이번에 인정된다면, 그것이 앞으로의 전례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는 쓰시마번에 큰 문제가 된다(e).
따라서 안용복 일행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받아야 마땅하다. 먼저 소송을 듣지 말고 돗토리번 영토로부터 바로 돌아가게 할 것(제1안f). 만약에 그렇게 못한다면 나가사키 부교 관아로 보내고,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본국에 송환하도록 권장할 것(제2안g). 소송을 듣지 않을 수 없다면 쓰시마번의 이테이안(埲缏埩) 입회하에 듣고, 막부에 보고할 것(제3안h).
7월 24일에 로주는 쓰시마번의 제1안을 받아들여
안용복 등을 직접 돌려보내도록 돗토리번에 최종 지시했다.[113] 이에 따라 안용복 등은 8월 6일에 가로에서 추방 당했다. 그 후 쓰시마번의 통역이 돗토리번에 도착했으나, 조선인이 떠난 뒤였으므로 그대로 돌아갔다.[114]
그 후 안용복 등은 강원도의 양양현(艴梲鉷)으로 돌아갔다는 보고가 8월 29일 강원감사로부터 조정에 들어왔다.[115] 안용복 등이 가로를 출발해 23일 후의 일이다. 그 사이에
안용복 등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오키도의 후쿠우라(暉塝)에 들렀다고 한다. 야다
다카마사(栴揷崅醕)亀장생 다케시마기(挿惗抾搰婰)亁에 의하면 乬이 섬으로부터 8년째
아벤테후 토라헤 비리를 바로잡아 인슈에 다시금 도해한 일乭이라는 구절에 외국인이 조선을 가리키고 돌아갔다는 기술이 있다. 이 구절에 기술 된 乪이 섬乫이란 다케시마이며, 乪아벤테후乫란 안용복, 乪토라헤乫란 박어둔을 말한다. 이 구절에서 안용복과 오키도민과의 이별을 乬외국인도 서운해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리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견디기
힘든 이별이었다.乭 라고 표현했다. 다만
이 문서는 신뢰성이 매우 낮으므로 그 기술은 곧 믿기는 어렵다.
안용복이 귀국한 후 조정에서 그가 지른 죄가 문제 되었다. 사헌부(巌寷晎)는 안용복을 주살(鎛嶦)할 것을 왕에게 요청했으나, 영의정 유상운(桍尙塣)이 처단할 수 없다고 건의했다. 그 이유는 쓰시마가 울릉도를 조선 땅이라고 인정해 왜인의 왕래를 금지시켰다고 말했으니, 이는 대체로 안용복의 공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안용복은 죽음을 면하고 유배되었다.[116]
(4) 안용복 제2차 도일의 목적
안용복은 왜 1693년에 연행 되었다가 3년이나
지나서 도일했을까? 그 때 안용복의 소송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의문에 대해 검토해 보겠다. 이와 관련해 이케우치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乪무라카미 가문 문서乫의 분석과
다른 역사자료와의 비교 및 검토에 의거해 본다면, 안용복의 소송 목적이 乬다케시마와
마쓰시마를 조선의 영토로 주장한다乭는 데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적
(1,7,9)[117]은 사료의 일부분을 확대 해석하여, 해당
사료를 둘러싼 전체적인 역사적 사실로부터 떼어내어 상상을 부풀린 결과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용복 등이 타케시마와 마쓰시마를 기재한 乪조선팔도지도乫를 지참해, 그것도 첫 대담(洈択)에서 먼저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겐로쿠 6년에 다케시마에서 포박(曔敍)되어 오키를 경유해 돗토리번으로 연행된 안용복은 돗토리번에서는 여러 가지의 옷이나 장신구등을 지급받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쓰시마번으로 인계되자 냉대를 받게 된다. 그러한 냉대를 받았던 사실을 돗토리번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한 당사자임을 돗토리번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다케시마에서
포박되어 마쓰시마와 오키를 거쳐 돗토리번의 요나고에 연행되었다는, 다시 말하면 乬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의 개시(奐帵)乭는 당시의 상황으로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산인(嶳堿)지방에서 사용 되었던 섬 이름亖마쓰시마와 실제로 자신이 포박되었던 섬亖다케시마가
기재된 乪조선팔도지도乫를 지참하는 것은, 확실한 증명서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118]
이케우치는 안용복의 소송 목적은 乬다케시마와 마쓰시마를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乭고 하며, 쓰시마번에서 乬냉대를
받았던 사실을 돗토리번에 호소하기 위해乭라고 하나, 이것은
의문이다. 단순히 냉대를 받았던 사실만을 호소하는 목적만으로 중대한 죄인 해금을 범하면서까지 일본에 갈 수
있을까? 보통 개인적인 원한 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옅어지는 법인데, 안용복이 쓰시마번에서 냉대받고 3년이나 지난 후에 원한을 호소하기 위해 중죄를 각오하면서까지 도일을 결의했다고 보기에는
동기가 약하다도 본다.
더욱 의문이 가는 점은 이케우치는 무라카미 가문의 문서와 다른 사료와의 비교 및 검토로부터 상기의 추론을 이끌어 냈다고 하나, 그 乪다른 사료乫에 조선의
사료가 어느정도 반영 되었는지는 밝혀 있지 않다. 안용복의 의도와 도일 목적이 亀동국문헌비고亁에 조금일지언정 기록되어 있지만, 그에 관한 언급은 되어 있지 않다. 亀동국문헌비고亁에는 안용복 나름대로의 의분(媊暜)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693년에) 안용복이 쓰시마번에 호송되었을 때, 대마도주는 관백(钀敀)의 명령을 위조해 몇 번이나 울릉도를 다투어 왔는데, 그것은 사실은 관백의 뜻이 아니었다. 쓰시마는 울릉도가 어(嫑)와 죽(抾)이 풍부하므로 그것을 가지는 것이 이롭고 또 차왜가 조선에 오면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므로 이로 말미암아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최근에 안용복이 그 간계(汙寁)를 모두 폭로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 안용복을 오랫동안 옥에 가두었다가 동래로 압송했다. 또 왜관에도 갇혔는데, 전후 90일 만에 비로소 풀려났다.
안용복은 동래부사에게 보고했으나 결국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
해, 접위관이 동래에 오자, 안용복은 다시 이전의 일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정 역시 그것을 믿지 않았다.
이 때 차왜가 누차 (동래에) 왔었는데, 만약
장래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틈이 생겨도 사람들은 이를 염려할 뿐, 쓰시마번이 기만한 바를 알 리가 없다.
안용복은 이처럼 자신을 오랫동안 감금시킨 쓰시마번에 대한 원한과, 그가
말하는 쓰시마번의 기만, 즉 막부의 명령인 척 하며 해산물이 풍부한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을 가져온 쓰시마번의
계책에 의분을 가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공술을 신용하지 았았던 접위관에 대한 불만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분이란 시간이 흐르면 점점 사라져가는 법이다. 그런데도 사건으로부터 3년이나 지난 후에 불만과 의분을 풀기 위해 도일 했다는 것은 그 3년 사이에
원한이나 의분을 되살리거나 더욱 쌓이게 하는 새로운 사건이 있어서 중대한 결의를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이에 관한 내용은 다음 절에서 다시 고찰하겠다.
5. 결론
(1) 가설; 안용복의 을릉도 도항은 3회 이상임
안용복이 중대한 해금의 죄를 범하면서까지 일본으로 도항한 것은 제1차 도일
이후 그에 상응할 만한 중대사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사건의 가능성으로서 필자는 안용복이 1695년에도 울릉도에 가서 그것에서 일본인을 만나지 않았을까하는 가설을 세워본다. 그 만남으로 인해 안용복은 마음속에 쌓여 있던 원한과 의분이 강하게 상기되어 다음해에 도일하는 동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안용복이 1695년에 울릉도로 도항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또 도항하지 않았다는 상황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안용복의 1694년부터 1695년까지의 행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저 1694년 8월 14일에 임명이 결정 된 접위관 유집일의 심문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한편 일본의 신뢰 할 수 있는 사료에 1695년에 많은 조선인이 울릉도로 도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돗토리번정 사료인 亀다케시마노 가키쓰케乮抾搰擵彂晬乯亁는 1692년부터 95년까지의 다케시마(울릉도) 도해상황을 막부에 보고했는데, 그 중에서 겐로쿠 7(1694)년과 다음 해에 관해 乬겐로쿠7(갑술년)과 겐로쿠8(을해년)인 두 해에 다케시마로 도항했지만, 조선인이 많이 있었으므로 어렵를 하지 않고 돌아왔다乭고 기록했다.[119] 이 사료를 고려하면 겐로쿠5년부터 9년까지 5년 연속 조선인이 울릉도로 도해한 셈이 된다. 또 돗토리번사인 오카지마가 정리한 亀다케시마 고(峫)亁에서도 겐로쿠 7년과 8년 모두 조선인이 도해해 있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막부, 다케시마로의 도해를 금지한다.
오야丒무라카와는
겐로쿠
5년부터
조선인 때문에 본업을 방해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 이를 자주 한탄하고 호소했다. 번의 지시를 받고 겐로쿠 7년과 8년에 배를 다케시마로 보냈으나, 조선인이 먼저 건너와 있었으며, 해마다 그 수는 증가하여, 후에는 이 쪽에 30명, 저 쪽에 50명의 무리가 형성되어, 방어를 엄중히 하고 있으니, 만약 이쪽의 배를 억지로 착륙할
때에는 큰 일을 피할 수 없을 듯싶어, 어쩔 수 없이 후퇴하고丒丒丒
이처럼 4년 연속으로 많은 조선인이 울릉도에 도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1694년에 한해서는 亀히카에쵸乮峊挔乯亁에
乬요나고의 오야와 무라카와가 다케시마로 도해하던 중 거친 바람을 만나, 도중에 돌아왔다는 보고가 있었다.乭라고 쓰여 있다.[120] 따라서 그 해는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은 다케시마(울릉도)에 당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편 1695년의 도해에 대해 亀히카에쵸亁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전년 오야와 무라카와 양 가문은
돗토리번을 상대로 다케시마에 만약 乬조선인이 있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乭라고 물었다. 이에 돗토리번에서는 乬조선인이 있을 때의 대처방법을
지시하는 것은 어렵다.乭라고 대답했다.[121] 이러한 대화로부터 미루어 보면, 오야丒무라카와
양 가문이 다케시마에서 조선인과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돗토리번에 보고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보고했다 하더라도, 돗토리번이 亀히카에쵸亁에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여간 亀다케시마노 가키쓰케亁에서 볼 수 있듯이 돗토리번은 그 해에도 도해했다고
막부에 보고했다. 다른 한편으로 亀다케시마 고亁는 96년에 막부의 다케시마 도해금지령이
내려진 무렵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다케시마에서 조선인들이 이쪽의 배를 보기만 하면, 큰 총을 쏴 대어, 해안 근처에는 갈 수가 없다고들
한다.
이 속담은 역사적 사실아라고 생각된다.
1693년에 조선 어민 안용복과 박어둔 두 사람이 아마 총칼로
위협받아 일본의 배에 연행 된 씁쓸한 경험이 계기가 되어,
상당히 경계를 하며 일본배의 습격에 대비하고 무장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그 시기는
위에 쓴 바로 1694년이 아니라 1695년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해에 안용복이 울릉도에 있었을 가능성은 다음의 상황에서 추측할 수 있다.
먼저 1696년에 안용복과 함께 출어했던 뇌헌도 역시 귀국후에 비변사에서 안용복의 공술을 그대로
지지했다. 亀숙종실록亁에는 乬뇌헌 등 다른사람의 공술 역시 대체로 똑같았다.乭라고 기록되었다.[122] 물론 뇌헌은 그것을 1696년의 일로 공술했겠지만, 당시는 해금정책이 실시되고 있던
때이므로, 만일 1695년에 도해했다 하더라도 일부러 새로운 죄를 인정하는 듯한 자백은 하지 않고 1696년의 일로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어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696년에 안용복 등이 오키도에 갔을 때에 다케시마는 울릉도이며, 마쓰시마는 자산도라고 말했으며, 두 섬사이의 거리나 자산도와 오키도 사이의 거리 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693년에 안용복이 연행되었을 때는 나가사키 부교 관아와 쓰시마번에서의 공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우산도에 대한 인식은 확실하지 않았다. 귀국
후에 그가 접위관에게 공술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亀변례집요亁에서 안용복은 자기가 본 섬을
다만 乪큰 섬乫이라고 했을 뿐, 그 섬의 이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94년의 단계에서는 안용복은 아직
마쓰시마나 자산도의 이름을 몰랐던 것 같다. 두 섬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1695년의 도해에서 일본인과 만나서
형성되었다고 한다면 시기적으로 맞고 96년에 자산도가 마쓰시마라는 그의 확고한 인식이 비로소 이해된다.
아마 안용복은 1695년에 출어하여 일본인이 울릉도에
있는 것을 직접 보고, 일본인이 조선영토에 끊임없이 도항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결심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일본인의 끊임없는 도항은 안용복의
입장에서 보면 쓰시마번의 乪기만乫 과 乪계책乫 이 계속된 결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 때문에 쓰시마번에 대한 의분이 더 쌓여, 돗토리번 혹은 에도 막부에게 울릉도에 관한 소송을
일으킬 결의를 하고 乪조선팔도지도乫 등을 준비하여, 다음해에 실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상와 같이 필자의 가설은, 안용복 등이 울릉도에서 만난 일본인을
내쫓았다는 안용복의 진술은 1696년이 아닌 1695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696년에 관해서는, 안용복의 공술을 그대로 적은 것으로
생각되는 乪무라카미 가문 문서乫에 울릉도에서 일본인과 만났다는 기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과의 만남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조선 역사서의 신뢰성
1695년에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과 만났다고 한다면, 그의
제2차 도일사건에 관한 공술은 굉장히 진실성이 있으므로 울릉도에서 일본인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는 대체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제2차 도일사건에 관해 다보하시 기요시(揷曐嫶寜)는 안용복의 공술에 대해 乬함부로 장담하는 경향은 있지만 대체로 사실일 수 있다乭라고 썼다.[123] 분명히 안용복의 공술 곳곳에 그의 독특한 호언장담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비변사에서 乬(자신이) 여기(일본)에 와서 울릉도와 자산도를 조선 땅으로 했으며 관백의 서계까지 받았다乭고 말한 것 등이다.[124]
그러나 실제로 사태의 추의는 안용복의 호언장담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전개되었다. 안용복의 도일이 계기가 되어, 에도 막부는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하고 그것을 쓰시마번이 조선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 乪다케시마 일건乫 교섭은 조선에게 바람직한 결과로 끝났다. 그 숨은 공로자로서 안용복이 조정에서 인정받았고, 그의 공술도 신뢰받기 시작해 이후의 사서에 사실인 것처럼 기술되었다. 특히 후대의 관찬서인 亀춘관지亁나 亀동국문헌비고亁등은 위와 같은 호언장담을 거의 사실인 것처럼 기술한 것이다. 안용복의 제2차 도일사건 뿐만 아니라 제1차도일사건 때의 안용복의 공술마저 거의 사실인 것처럼 기술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안용복사건과 같은 시기의 관찬서인 亀숙종실록亁이나 亀비변사등록亁 ,亀승정원일기亁,亀변례집요亁등은 그 때마다 안용복의 공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면서 기술했으므로, 안용복의 장담을 비교적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한 판단은 쓰시마번과의 어려운 교섭을 수행하는데 필수 작업이었다. 만약 그 판단에 잘못이 생기면, 그것은 그대로 외교교섭에 영향을 미친다. 그 예의 하나가 제1차 도일시에 안용복이 에도로 갔다는 공술이다. 이미 쓴 바와 같이 안용복은 여러 상황에서 이나바국을 에도로 착각했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조정에서 乪쓰시마번의 계책乫을 믿게 되었고, 강경한 노선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 일건 이외에는 亀숙종실록亁의 기술에 큰 문제점은 보이지 않는다. 亀숙종실록亁은 안용복의 공술을 그대러 적었지만, 그것을 무조건 믿었던 것이 아니라, 나름 대로 분석을 하고 진위를 가렸던 것이다. 亀숙종실록亁 이외에도 안용복사건과 동시대의 관찬서는 안용복 사건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므로 신뢰성이 높다.
한편 후대 관찬서인 亀춘관지亁나 亀동국문헌비고亁는 안용복이 에도로 갔는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아무 기술이 없는데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마 이 서적 등은 안용복이 에도로 가지 않았다라고 판단하여 亀숙종실록亁의 잘못을 바로 잡았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관찬 역사서는 일장일단이므로 신중한 문헌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고문서를 읽을 때의 철칙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여간 안용복이 주장한 울릉도 (다케시마) 및 자산도 (마쓰시마)는 조선영토다라는 인식이 관찬 역사서에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앞의 亀동국문헌비고亁 (1770) 에는 乬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다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은 왜(榒)가 이르는 바 송도(徏搰)다乭라고 기록되었다. 그 후 이 인식은 亀만기요람亁이나 亀증보문헌비고亁등에 계승되어, 오늘날의 독도문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 본 논문은 捁庢抁婜戝泏 亀杒搶傾僕傾暥壔硏媶亁 제29호 (2009) 에 발표한 논문 乽埨龍暉帠審偲 捁庢斔乿의 가필 번역임을 벍혀둔다.
** 擔杮 抾搰=嗾搰栤戣硏媶NET 대표
[1] 신용하 亀한국의 독도영유권 연구亁 (경인문화사, 2000) 9쪽.
[2] 壓瀶惓抝 乽擔杮偺椞搚乽抾搰乿偺歷巎傪夵鈧偣偟幰偨偪傛乿亀彅孨亁2007.9寧, p.99.
[3] 內摗惓拞亀抾搰(烼椝搰)傪傔偖傞擔挬钀學巎亁懡夑弌斉, 2000, p.9 (번역 亀嗾搰와 抾搰亁제이엔씨, 2005, p.22.)
[4] 에도시대, 정치의 실무는 도쿠가와 장군에 직속되는 4, 5명의 로우주우(老拞)가 매월 교대로 맡았다. 당번인 로우주우는 한 명으로, 월번 로우주우(寧斣老拞)이라 불렸으며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5] 亀히카에쵸 (峊挔)亁尦釸5 (1692)년 5월 10일.
[6] 亀沌廆泬錄亁沌廆20(1694)擭2寧23擔.
[7] 亀抾搰婭帠亁에는 戝嵎巊惓姱丒懡揷鋙嵍塹栧의 이름으로 나온다.
[8] 亀绮椺廤梫亁櫳17乽塗椝搰乿忦, 1694擭1寧
[9] 亀旛绮巌摚錄亁沌廆19(1693)擭11寧14擔
[10] 亀抾搰婭帠亁尦釸6(1693)擭9寧4擔
[11] 乽嶌嫲岥忋擵鍿乿亀戝扟壠屆暥彂亁, 거의 같은 내용이亀抾搰擵彂晬亁에도
있다.
[12] 전게. 変乆斵搱僯旊嵼岓內 彫壆傪妡 彫壆擵斣僯僴僋僩儔僸梌怽幰焝抲岓檤僯巐寧廫幍擔僯擔杮慏堦鋤嶲傝 揤娫僯幍敧恖忔岓帶塃擵彫壆僯櫼僶僋僩儔僸傪曔 揤娫傊忔偣 栟彫壆僯抲岓暯曪氥庢槱偣旊弌岓晅 傾儞儓僌懘強僯櫼 澬怽 僶僋僩儔僸傪棨峕梘壜怽梌懚 揤娫僯槱岓傊僴 憗懍慏傪弌偟兩恖嫟僯杮慏僯槱偣憗懍弌慏巇 瑾婒殸僯摨擓擇擔僯旊拝怽岓 懘娫幰梞拞僯旊嵼岓
[13] 乽尦釸榋擭 抾搰傛傝攲廈偵挬慛恖楢曉傝岓庯, 戝壆嬨塃塹栧乮儅儅)慏摢岥忋鍿乿亀捁庢斔巎亁戞6櫳, P469, 亀場晎歷擭戝瓒廤亁
[14] 亀绮椺廤梫亁櫳17乽塗椝搰乿瀶, 1694년 1월
[15] 전게, 1964년 8월
[16]亀峊挔亁尦釸6(1693)擭1寧19擔
[17] 亀绮椺廤梫亁櫳17乽塗椝搰乿瀶, 1694년 1월
[18] 亀場晎歷擭戝瓒廤亁尦釸5(1692)擭7寧24擔, 尦釸5擭는 尦釸6擭의 잘못.
[19] 壓瀶惓抝 乽抾搰栤戣峫乿亀尰戙僐儕傾亁1966擭5寧錴, P62
[20] 搰崻導抾搰栤戣硏媶橉亀乽抾搰偵钀偡傞挷嵏硏媶乿嵟廔曬崘彂亁2007,P4
[21] 안용복의 제2차 도일 때 오키의 번소(斣強)가 안용복 배에 실린 소지품이나 장비를 자세히 검사했는데 그 속에 나침반의 기록은 없다.
[22] 揷愳岶嶰 乽槹嶳搰偵偮偄偰乿亀抾搰栤戣硏媶帒椏亁10, 搰崻導殼彂娰소장,1953, P100
[23] 亀抾搰婭帠亁尦釸6 (1693)년 5월 13일
[24]亀場晎歷擭戝瓒廤亁尦釸6(1693)擭5寧28擔
乪搨恖嫫恖偺內捠偠怽岥乫
嶰奅偺僔儍僋儚儞傛傝楦庢忋働怽岓僯偰旐嬄晅
壗殸偲怽巜殼僴柍擵桼 嫀擭櫼岓幰抾搱傊櫼岓為 怽暦岓桼 抾搱僯偰榓婓(晍)楦庢梘怽桼
塃嫫恖搨恖嫻僯寽怽岓嶥擵暥帤 嵍擵捠丒丒丒丒丒丒
[25] 揷愳岶嶰, 앞의 책, 1988, P.27
[26] 4寧27擔晅乽戝扟嬨塃塹栧慏摢岥忋彂乿亀場晅歷擭戝瓒廤亁尦釸6(1693)擭5寧28擔 및 亀戝扟壠暥彂亁
[27] 亀峊挔亁4寧28擔瀶
[28] 亀屼梡恖擔婰亁5寧9擔瀶
[29] 전게, 5寧15擔瀶
[30] 전게, 5寧15擔瀶
[31] 亀峊挔亁尦釸6(1693)擭5寧26擔瀶
[32] 전게, 5寧28擔瀶
[33] 전게, 5寧11擔瀶
[34] 전게, 5寧2擔瀶
[35] 나이토 세이츄, 앞의 책, 2005, P100
[36] 亀屼梡恖擔婰亁6寧10擔瀶
[37] 전게, 8寧9擔瀶
[38] 전게, 5寧21擔瀶 및 亀抾搱擵彂晅亁
[39] 전게, 乬抾搰偼 偼側傟搱僯偰恖廧嫃偼晄巇岓 栟 攲闼庣巟攝強僯偰傕柍擵岓乭
[40] 亀沌廆泬錄亁沌廆22(1696)擭9寧25擔
[41] 전게, 10寧23擔
[42] 전게, 10寧13擔
[43] 亀沌廆泬錄亁沌廆20(1694)擭8寧14擔
[44] 亀抾搰搉樢桼樢婰漊彂亁
捁晎昞屼嬦枴擵忋 搨恖峕晎傊屼堷搉 懃峕戶昞屼慂鑧憡郱 弴乆屼憽焏偲惉儖 暿婰桳擵備傊 棯擵
[45] 抮內晀, 앞의 책, 2006, P249
[46] 揷懞鸆嶰亀搰崻導抾搰偺怴硏媶亁搰崻導幄峴, 1996丆P13
[47] 亀沌廆泬錄亁沌廆20擭8寧14擔
[48] 亀抾搰婭帠亁尦釸7(1694)擭9寧12擔
[49] 전게, 尦釸8擭6寧
[50] 다른 이름은 소우 요시자네(廆媊崃). 전 번주인 소우 요시쓰구(廆媊椣)는 尦釸俈(1694)擭9寧27擔에 사망하여, 소우
요시자네가 새로운 번주로 된 어린 소우 요시미치(廆媊曽), 별명 지로우(師)의 후견인으로 됐음.
[51] 전게, 尦釸8擭10寧, 및亀堥抾搰鍿彂亁. 후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음.
岥忋擵鍿
丒丒丒丒丒
嫀乀擭抾搱偵偰旐棷抲岓挬慛恖嫫恖斵殸峕憲洔岓檤, 嫏柉嫟場敠晎幰峕戶鋙懚, 搶晹傛傝挿嶈枠旐尛岓墬搑拞幰, 寢峔屼抷憱旐嬄晅岓摼嫟, 洈攏庣曽峕屼搉旐惉岓埲屻, 寈屌摍殠曒怽晅憲娨岓抜
[52] 亀抾搰婭帠亁尦釸6(1693)擭6寧
挬慛恖嫫恖 屲寧幍擔場敠幄懌 榋寧夾擔挿嶈峕摓拝 場敠傛傝岇憲擵屼巊幰徏暯攲闼庣為屼壠樢 嶳揷鋙嵍塹栧 暯堜恟塃塹栧
憁恖澤 杴廍梋恖憡晬 栟挬慛恖夗棿偵偰旐憡憲岓
[53] 亀抾搰婭帠亁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두 책이 있으나, 그 중의 하나는 총 인원을 乪嬨廍梋恖乫라 했다. 그러나
돗토리번의亀峊挔亁나亀屼梡恖擔婰亁의 기술에 의하면 동반자의 총인원은 乪廍梋恖乫이다. 상식적으로도乪 嬨廍梋恖乫은 너무 많다. 그리고 공문서관에 있는 다른亀抾搰婭帠亁에서는 乪嬨乫자를 乪杴(약이란 뜻)乫자의 堎懱帤로 받아드릴 수 있는 요지가 조금은 있다. 그러므로 亀抾搰婭帠亁에 있는 乪嬨乫자는 필사시에 잘못이라 생각됨으로 본고에서는
乪약
10梋恖乫이라 한다.
[54] 1696擭의亀尦釸嬨暩巕擭 挬慛廙拝娸 堦櫳擵鍿彂亁에 의하면 허리에 띤 패에 乬捠惌懢晇 埨棿暉 擭峛屵惗乭이라 쓰여 있으므로 1654擭惗이고, 제1차 도일시의 달력 나이는 40살이다.
[55] 亀抾搰婭帠亁尦釸6(1693)擭6寧
[56]
전게
[57]
전게, 尦釸6(1693)擭8寧14擔
[58]
전게, 尦釸6(1693)擭俋寧俁擔
[59]
전게, 尦釸6(1693)擭俋寧4擔, 挬慛恖岥彂
[60]
전게, 尦釸6(1693)擭10寧, 廆媊椣가 釾憘櫼敾에게 보낸彂娙
[61]
전게, 尦釸6(1693)擭6寧23擔
[62] 亀捠峲堦鎀亁櫳擵昐擇廫嬨, 挬慛殸晹昐屲에 야자에몬(淺嵍塹栧)사건에 관하여乽尦榓榋峂怽擭丄廆洈搰庣媊惉丄柦偵傛傝偰抾搰[挬慛殸洟搰]偵墬偰愽彜偺傕偺擇恖傪曔傊偰嫗巘偵憲傞乿라는 기사가 있다.
[63] 亀抾搰婭帠亁尦釸6(1693)擭俋寧4擔.
[64]
전게, 尦釸6(1693)擭10寧
[65] 亀沌廆泬錄亁沌廆20(1694)擭,
2寧23擔
서한의 번각문은, 揷拞峃晇丒揷戙榓惗亀挬慛捠岎戝婭亁柤挊弌斉, 1978, P282
[66] 전게, 沌廆19(1693)擭11寧18擔
[67] 전게, 尦釸6(1693)擭 12寧 1侽擔, 乪惓姱岥忋乫
[68] 전게, 尦釸俈(1694)擭 2寧 22擔
[69] 전게, 尦釸俈(1694)擭 塠俆寧 13擔
[70] 亀沌廆泬錄亁沌廆20(1694)擭 8寧 14擔
[71] 亀抾搰婭帠亁尦釸8(1695)擭 6寧
[72] 亀沌廆泬錄亁沌廆20(1694)擭 8寧 14擔
[73] 乬晄媊偲偼怽岓帶傕, 拤岟偲偼旐怽娫晘乭 抮內, 앞의 책, P296
[74]亀抾搰婭帠亁尦釸8(1695)擭 10寧
[75]亀抾搰擵彂晬亁
[76]亀抾搰婭帠亁尦釸9(1696)擭 1寧 28擔
[77]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1寧 28擔
[78]亀堥抾搰鍿彂亁 및 亀堥抾搰帠棯亁
[79]亀屼梡恖擔婰亁尦釸俋(1696)擭 8寧 1擔
攲廈暷巕擵挰恖 懞愳巗暫塹 戝壆恟媑峕 岦屻抾搱搉奀擵媀
惂嬛旐嬄弌擵巪 嵟慜屼嵼晎擵內旐惉屼曭彂 屼焏殸擵忋傪埲 塃擵抜 巗暫塹 恟媑峕旐嬄搉岓為 戝媣曐壛夑庣屼巜殼僯晅偰 崱擔栱壜啜惂嬛擵巪旐嬄晅擵
[80]亀抾搰婭帠亁尦釸9(1696)擭
1寧 28擔
[81] 전게, 尦釸9(1696)擭10寧
[82]亀岞暥錄亁內柋徣擵晹, 柧帯10(1877)擭 3寧
[83]亀抾搰婭帠亁尦釸10(1697)擭
[84]亀沌廆泬錄亁沌廆22(1696)擭 9寧 2俆擔
[85] 전게
[86] 搰崻導抾搰栤戣硏媶橉, 앞의
책, P4
[87]亀峊挔亁尦釸7(1694)擭
11寧 26擔
[88]亀抾搰峫亁壓櫳, 및 亀抾搱擵彂晬亁
[89]亀沌廆泬錄亁沌廆22(1696)擭 9寧 25擔
[90] 內摗惓拞丒杙鄗涉, 앞의 책, 2007, P290
[91]亀峊挔亁尦釸9(1696)擭 6寧 5擔
[92]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6寧 13擔
[93]亀峊挔亁尦釸9(1696)擭 6寧 5擔
[94]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6寧 13擔
[95]亀場敠巙亁,亀抾搰峫亁,亀場晎歷擭戝瓒廤亁
[96]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6寧 22擔
[97]亀攲闼巙亁
[98]亀抾搰婭帠亁尦釸9(1696)擭 6寧 23擔
[99] 壀搰惓媊,
亀抾搰峫亁, 壓櫳
[100]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6寧 22擔
[101]亀沌廆泬錄亁沌廆22(1696)擭 10寧 13擔
[102] 전게, 沌廆23(1697)擭 2寧 14擔
[103] 亀抾搰婭帠亁尦釸11(1698)擭 4寧
[104] 전게, 尦釸9(1696)擭 6寧 23擔
[105] 亀屼梡恖擔婰亁尦釸6(1693)擭 6寧 29擔
[106] 亀抾搰婭帠亁尦釸9(1696)擭 俈寧 俈擔
[107] 亀峊挔亁尦釸9(1696)擭 6寧 14擔
[108] 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6寧 22擔
[109] 亀峊挔亁尦釸9(1696)擭 俈寧 22擔, 및 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俈寧 22擔
[110] 亀抾搰婭帠亁尦釸9(1696)擭 6寧 23擔
[111] 전게, 尦釸9(1696)擭 7寧 7擔
[112] 抮內晀, 앞의 책, P311, 다만 방선부의 원문은 생략함.
[113] 亀屼梡恖擔婰亁尦釸9(1696)擭 7寧 7擔
[114] 전게, 尦釸9(1696)擭 8寧 18擔
[115] 亀沌廆泬錄亁沌廆22(1696)擭 8寧 29擔
[116] 전게, 沌廆23(1697)擭 3寧
27擔
[117] 巜揈(1), 內摗惓拞, 乽瑾婒偺埨棿暉乿亀杒搶傾僕傾暥壔硏媶亁22錴, 2005
巜揈(7), 壓瀶惓抝, 亀僼僅僩偟傑偹亁161錴
巜揈(9), 김병열, 乽안용복을 위한 해명乿亀한일 전문가가 본
독도亁다다미디아, 2006
[118] 抮內晀, 앞의 논문, P9
[119]亀抾搰擵彂晬亁 乪抾搰擵彂晬嶰捠, 偦偺擇乫
[120]亀峊挔亁尦釸7(1694)擭
5寧 9擔
[121] 전게, 尦釸7(1694)擭 11寧 26擔
[122] 亀沌廆泬錄亁沌廆22(1696)擭 9寧 25擔
[123] 揷曐嫶寜, 乽烼椝搰偦偺幄尒偲椞桳乿亀媢泏憄亁戞3錴, 1931, P20
[124] 亀沌廆泬錄亁沌廆22(1696)擭 9寧 25擔